
오래된 질문, 여전히 답이 없는
지난주 친구들과 저녁을 먹다가 나온 이야기였다. "남자와 여자 사이에 순수한 우정이 가능할까?" 누군가는 당연히 가능하다고 했고, 누군가는 불가능하다고 했다. 술자리는 이 논쟁으로 한참 시끄러웠다.
집에와서 아내에게 똑같은 질문을 던져보았다. 아내 역시 나름대로의 생각을 가지고 있지만 결론은 나지않았다. 사람마다 다 생각이 다르니 하나의 답으로 모이지를 못한다.
집에 돌아와서 문득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When Harry Met Sally, 1989)'가 떠올랐다. 이 영화가 던지는 질문도 똑같다. 그리고 35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답은 명확하지 않다. 어쩌면 그래서 이 영화가 계속 사랑받는 게 아닐까.
빌리 크리스탈과 멕 라이언, 완벽한 호흡
빌리 크리스탈이 연기한 해리 번스는 냉소적이고 신경질적인 남자다. 모든 것을 복잡하게 생각하고, 관계에 대해 지나치게 분석한다. 하지만 그 안에는 상처받기 싫은 두려움이 숨어 있다.
멕 라이언이 연기한 샐리 올브라이트는 정반대다. 긍정적이고, 질서정연하며, 감정을 잘 정리한다. 식당에서 주문할 때도 세세하게 요구사항을 말하는 완벽주의자. 하지만 그녀도 역시 상처받기 싫어서 통제하려는 사람이다.
두 사람의 첫 만남은 1977년 시카고 대학교 졸업 후다. 뉴욕까지 함께 차를 타고 가면서 18시간 동안 대화한다. 해리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한다. "남자와 여자는 친구가 될 수 없어. 섹스 문제가 항상 끼어들거든." 샐리는 반박한다. 그리고 둘은 헤어진다.
5년 후 공항에서 우연히 재회한다. 각자 연인이 있는 상태. 다시 헤어진다. 또 5년 후, 서점에서 다시 만난다. 이번에는 둘 다 싱글이다. 그리고 진짜 친구가 되기로 한다. 순수한 우정을 유지하기로 약속한다.
뉴욕의 사계절, 관계의 변화
영화는 뉴욕의 아름다운 풍경을 배경으로 한다. 센트럴 파크,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카츠 델리, 워싱턴 스퀘어 파크. 계절이 바뀌면서 해리와 샐리의 관계도 변한다.
가을, 그들은 산책하며 대화한다. 삶에 대해, 죽음에 대해, 관계에 대해. 해리는 신문 부고란을 먼저 본다고 고백한다. 자기가 아는 사람이 죽었는지 확인하기 위해. 이상하지만 솔직한 고백. 샐리는 웃으면서도 이해한다.
겨울, 함께 크리스마스 트리를 산다. 친구들과 더블 데이트를 한다. 오페라를 보고, 늦은 밤 식당에서 파이를 먹으며 이야기한다. 그들의 우정은 깊어진다. 하지만 동시에 미묘한 긴장감도 생긴다.
봄, 해리의 친구와 샐리의 친구가 사귀기 시작한다. 오히려 해리와 샐리는 더 가까워진다. 함께 카라오케를 하고, 박물관을 다니고, 해리는 샐리의 악몽 이야기를 들어준다. 심지어 샐리의 전 남자친구가 결혼한다는 소식을 듣고 우는 그녀를 위로한다.
그리고 그날 밤, 선을 넘는다.
카츠 델리 장면, 영화사에 남은 명장면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하면 누구나 떠올리는 장면이 있다. 카츠 델리에서 샐리가 오르가즘 연기를 하는 장면. 영화사에 남을 명장면이자, 멕 라이언의 커리어를 정의하는 순간.
해리가 여자들이 오르가즘을 가짜로 연기할 수 있다는 걸 모른다고 하자, 샐리는 직접 시범을 보인다. 만원인 델리 한가운데서, 대낮에, 사람들이 다 보는 앞에서. "Yes! Yes! Yes!" 모두가 멈춰 서서 쳐다본다.
옆 테이블의 할머니가 웨이터에게 말한다. "I'll have what she's having.(저 여자가 먹는 걸로 주세요.)" 이 한 줄의 즉흥 대사가 영화의 가장 유명한 대사가 됐다. 참고로 이 할머니는 감독 롭 라이너의 실제 어머니다.
이 장면이 단순히 웃기기만 한 게 아니다. 남녀 관계에서의 소통, 오해, 그리고 친밀함에 대한 메타포다. 해리와 샐리는 이렇게 서로에 대해 솔직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사이다. 하지만 그 친밀함이 우정의 선을 넘을 위험이 있다는 것도 보여준다.
노라 에프런의 각본, 현실적인 대화
이 영화의 각본을 쓴 노라 에프런은 로맨틱 코미디의 거장이다.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 '유브 갓 메일' 등 주옥같은 작품들을 만들었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의 각본이 최고라는 평가를 받는다.
대사가 너무나 자연스럽고 현실적이다. 사람들이 실제로 할 법한 이야기들. 사소한 일상, 우스꽝스러운 걱정, 진지한 고민. 감독 롭 라이너와 노라 에프런은 실제 자신들의 경험과 친구들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각본을 썼다고 한다.
특히 해리와 샐리가 전화로 밤새 이야기하는 장면들이 좋다. 각자 집에 누워서, 침대에서, 전화기를 귀에 대고 이야기한다. "지금 뭐 해?" "TV 봐." 특별한 내용도 없는 대화지만, 그 편안함이 느껴진다. 진짜 친한 사람과만 나눌 수 있는 아무 의미 없는 수다.
영화 중간중간 삽입되는 노부부들의 인터뷰도 천재적이다. 실제 부부들이 어떻게 만났는지 이야기하는 장면. 다큐멘터리 형식. 이것이 해리와 샐리의 이야기와 대조를 이루며, 사랑의 다양한 형태를 보여준다.
관계의 단계, 12년의 여정
영화는 12년에 걸친 이야기다. 1977년부터 1989년까지. 해리와 샐리는 세 번 만나고, 마침내 친구가 되고, 사랑에 빠진다. 이 긴 시간이 중요하다. 즉각적인 사랑이 아니라 서서히 쌓이는 관계.
첫 만남에서 해리는 오만하고 불쾌하다. 샐리도 그를 싫어한다. 두 번째 만남에서는 서로 다른 인생을 살고 있다는 걸 확인한다. 세 번째 만남에서야 비로소 진짜 대화가 시작된다.
우정 단계에서 그들은 서로를 정말로 알아간다. 겉모습이 아니라 진짜 모습을. 약한 모습, 우스꽝스러운 습관, 깊은 두려움. 이 과정이 있었기에 나중에 사랑으로 발전하는 게 설득력 있다.
샐리의 전 남자친구 조가 결혼한다는 소식을 듣고 우는 장면이 전환점이다. 해리가 달려와 위로한다. 그리고 그날 밤 같이 잔다. 다음 날 아침, 어색함. 관계가 어긋난다.
몇 주 동안 연락이 끊긴다. 서로를 피한다. 우정이 깨진 것 같다. 하지만 그 시간 동안 둘 다 깨닫는다. 상대가 얼마나 중요한지.
새해 전야, 마지막 고백
영화의 클라이맥스는 새해 전야 파티다. 샐리는 친구들과 파티에 있고, 해리는 홀로 거리를 걷는다. 그리고 깨닫는다. 자신이 샐리를 사랑한다는 것을.
해리가 파티장으로 달려간다. 숨을 헐떡이며 샐리를 찾는다. 그리고 고백한다. 샐리가 좋은 이유를 하나하나 열거한다.
"추울 때 코 끝이 조금 주름지는 게 좋아요. 당신이 나를 볼 때의 그 표정이 좋아요. 당신과 하루 종일 같이 있고 나면, 잠들기 전에도 당신 목소리가 듣고 싶어요. 그리고 그게 섹스가 아니에요. 내가 여생을 함께 보내고 싶은 사람을 찾았기 때문이에요. 그리고 내 여생을 가능한 한 빨리 시작하고 싶어요."
이 대사가 완벽한 이유는 거창한 고백이 아니라 구체적이고 사소한 것들이기 때문이다. 진짜 사랑은 상대의 작은 습관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 사람만의 독특함을.
샐리는 처음에는 화가 나 있지만, 결국 키스한다. 자정의 카운트다운이 시작되고, 오래된 노래 'Auld Lang Syne'이 흐른다. 완벽한 로맨틱 코미디의 엔딩.
남자와 여자, 그리고 우정
결국 영화는 해리의 초반 질문에 대한 답을 준다. "남자와 여자는 친구가 될 수 없다"는 그의 말은 맞았을까, 틀렸을까?
영화의 답은 모호하다. 해리와 샐리는 친구였지만, 결국 사랑에 빠졌다. 그렇다면 섹스 문제가 끼어든 걸까? 아니면 우정이 더 깊은 사랑으로 발전한 걸까?
개인적으로는 둘 다 맞다고 생각한다. 진짜 친구가 될 수 있지만, 그 우정이 충분히 깊어지면 사랑으로 변할 수 있다. 문제는 타이밍과 서로의 마음이다.
영화는 또 다른 메시지도 전한다. 최고의 연인은 최고의 친구여야 한다는 것. 해리와 샐리가 잘 어울리는 이유는 서로를 진심으로 좋아하고, 대화가 통하고, 함께 있는 게 편하기 때문이다. 로맨스 이전에 우정이 있었기에 더 단단한 관계가 된다.
80년대 뉴욕의 감성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는 80년대 후반 뉴욕의 감성을 완벽하게 담아냈다. 워크맨으로 음악을 듣고, 공중전화로 전화하고, 비디오 가게에서 영화를 빌린다. 지금 보면 낯선 풍경이지만, 그래서 더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뉴욕의 계절감도 아름답다. 가을의 낙엽, 겨울의 눈, 봄의 벚꽃. 해리와 샐리가 센트럴 파크를 걷는 장면들은 그 자체로 뉴욕 여행 가이드 같다.
음악도 완벽하다. 해리 코닉 주니어가 부른 스탠다드 재즈 넘버들. 'It Had to Be You', 'But Not for Me', 'Let's Call the Whole Thing Off'. 클래식한 곡들이 영화의 로맨틱한 분위기를 더한다.
시대를 초월한 로맨틱 코미디
35년이 지났지만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는 전혀 낡지 않았다. 기술은 변했고, 연애 방식도 변했지만, 사람의 감정은 변하지 않았다. 누군가를 좋아하는 설렘, 거절당할 두려움, 관계의 어색함, 사랑에 빠지는 기쁨.
요즘은 데이팅 앱으로 만나고, 문자로 대화하고, SNS로 연락한다. 하지만 본질은 같다. 서로를 알아가고, 마음을 열고, 신뢰를 쌓고, 사랑에 빠진다. 이 영화가 보여주는 관계의 단계들은 지금도 똑같이 적용된다.
로맨틱 코미디 장르의 교과서 같은 영화다. 이후 수많은 로맨틱 코미디가 이 영화의 구조를 따라했다. 남녀가 만나고, 서로 싫어하고, 친구가 되고, 사랑에 빠진다. 하지만 원조만큼 완벽한 작품은 드물다.
마치며
영화를 다시 보고 나니 지난주 술자리의 논쟁이 다시 떠올랐다. 남녀 사이에 순수한 우정이 가능할까? 여전히 답은 모르겠다. 어쩌면 정답이 없는 질문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 좋은 관계는 서로를 진심으로 알아가는 것에서 시작된다는 것. 그게 우정이든 사랑이든, 상대를 이해하고 존중하고 함께 웃을 수 있어야 한다.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는 단순히 남녀의 사랑 이야기가 아니다. 인간관계에 대한, 소통에 대한, 그리고 진정한 친밀함에 대한 이야기다. 빌리 크리스탈과 멕 라이언의 케미스트리는 완벽하고, 노라 에프런의 각본은 빛나고, 뉴욕의 풍경은 아름답다.
만약 로맨틱 코미디를 좋아한다면, 혹은 관계에 대해 생각해보고 싶다면, 이 영화를 강력히 추천한다. 30년이 넘은 영화지만 지금 봐도 전혀 어색하지 않다. 오히려 요즘 나오는 로맨틱 코미디들보다 더 현실적이고 공감 가는 이야기다.
"I'll have what she's having." 이 대사를 듣고 웃을 준비를 하시라.
영화 정보
- 제목: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 (When Harry Met Sally)
- 개봉: 1989년
- 감독: 롭 라이너
- 각본: 노라 에프런
- 출연: 빌리 크리스탈, 멕 라이언, 캐리 피셔, 브루노 커비
- 장르: 로맨틱 코미디
- 러닝타임: 96분
- 평점: ★★★★★ (5/5)
이런 분들께 추천합니다
- 멕 라이언의 전성기 연기를 보고 싶은 분
- 현실적이고 공감 가는 로맨틱 코미디를 원하는 분
- 노라 에프런의 각본을 좋아하는 분
- 80년대 뉴욕의 감성을 느끼고 싶은 분
- 남녀의 우정에 대해 생각해보고 싶은 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