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91년, 액션 영화의 정점
'터미네이터 2'를 극장에서 본 건 내가 중학생 즈음이었던거 같다. 터미네이터를 TV에서 보고 너무 재미있어서 터미네이터2는 개봉했을때 극장에가서 보았던것으로 기억이 난다. 영화속에서 T-1000이 처음 등장하던 그 장면이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난다. 액체 금속으로 만들어진 로봇, 총을 맞아도 그대로 재생되고, 쇠창살 사이를 물처럼 흘러 들어가고, 어떤 모습으로든 변신할 수 있는 존재. 1991년에 이런 장면을 본다는 게 그저 충격이었다. 솔직히 지금 다시 봐도 여전히 충격적이다.
제임스 카메론 감독은 1편의 성공 이후 곧바로 속편을 만들 수 있었지만, 무려 7년을 기다렸다. 기술이 준비될 때까지, 자기가 머릿속에 그려둔 T-1000을 화면 위에 완벽하게 구현할 수 있을 때까지. 그 기다림은 충분히 값어치를 했다. ILM의 CGI 기술과 스탠 윈스턴의 특수효과 팀이 힘을 합쳐 영화사에 남을 만한 빌런을 탄생시켰다.
그리고 아놀드 슈워제네거가 다시 터미네이터로 돌아온다. 하지만 이번에는 완전히 다른 역할이다. 1편에서는 무자비한 살인 기계였지만, 2편에서는 존 코너를 지키는 수호자다. 같은 모델, 같은 배우인데 관객이 느끼는 감정은 정반대다. 이 반전 설정이 정말 천재적이라고 생각한다. 1편에서 공포의 대상이던 T-800을, 이번에는 온 마음을 다해 응원하게 되니까.
학원에서 과학을 가르치다 보면 인공지능 이야기를 할 때 학생들이 꼭 이렇게 묻는다.
"선생님, 진짜로 AI가 발전하게되면 로봇이 인간을 공격할 수 있어요?"
솔직히 단정해서 말할 수 없다고 답한다. 기술은 계속 발전하고 있고, AI는 점점 더 똑똑해지고 있다. 어디까지 갈지, 어떻게 통제해야 할지, 아무도 확실히 모른다. 그래서인지 30년이 지난 지금도 ‘터미네이터 2’가 던지는 경고는 여전히 유효하다.
심판의 날을 막아라
영화는 미래 전쟁의 풍경으로 시작한다. 2029년, 기계가 지배하는 세계. 해골 더미 위를 금속 골격 로봇들이 짓밟으며 지나가고, 하늘에는 헌터킬러가 떠다니며 인간을 사냥한다. 말 그대로 지옥 같은 미래다.
하지만 이 미래는 ‘확정된 운명’이 아니라 ‘막을 수 있는 가능성’이다. 1997년 8월 29일, 이른바 심판의 날(Judgment Day)이 오기 전에 스카이넷의 탄생을 저지할 수 있다면, 핵전쟁도, 그 이후의 학살도 바꿀 수 있다. 존 코너가 저항군 지도자로 자라기도 전에, 역사를 다른 방향으로 틀 수 있는 것이다.
1995년의 과거로 두 대의 터미네이터가 보내진다. 하나는 존 코너를 죽이기 위해, 하나는 존을 지키기 위해. 액체 금속으로 된 신형 터미네이터 T-1000(로버트 패트릭)은 경찰의 모습으로 위장해 존을 추적하기 시작한다. 반면 구형 모델인 T-800(아놀드 슈워제네거)은 어둠 속에서 홀로 등장해 바이커들에게서 옷과 오토바이를 빼앗는다. "I need your clothes, your boots, and your motorcycle." 이 한 문장으로 아놀드의 존재감이 다시 한 번 폭발한다.
쇼핑몰에서 마침내 두 터미네이터가 마주친다. 그 한가운데에 아직 어린 존 코너(에드워드 펄롱)가 서 있다. 좁은 복도에서 총성이 울리고, T-800은 산탄총으로 T-1000을 쏘아 날려 보지만, 액체 금속으로 된 몸은 금세 구멍을 메운다. 존은 오토바이를 타고 필사적으로 도망치고, T-800은 그 뒤를, T-1000은 거대한 트럭을 몰고 추격한다.
LA의 수로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오토바이와 트럭의 추격전은 액션 연출의 교과서 같은 장면이다. 실제 도로와 수로에서 스턴트맨들이 몸을 던지며 촬영했고, CGI의 도움에만 기대지 않았기 때문에 화면에서 느껴지는 속도감과 무게가 다르다. 요즘 영화와 비교해도 결코 밀리지 않는 시퀀스다.
엄마 사라 코너
사라 코너(린다 해밀턴)는 정신병원에 수감된 상태로 등장한다. 미래에서 온 로봇과 핵전쟁 이야기를 늘어놓으니 세상은 그녀를 ‘망상증 환자’로 취급한다. 하지만 사라는 미쳐서가 아니라, 오히려 너무 정신이 멀쩡해서 이런 상황에 놓인 사람이다. 진실을 알고 있고, 다가올 전쟁을 대비해 혼자 준비해온 사람이다.
1편의 사라와 2편의 사라는 완전히 다른 인물처럼 보인다. 1편에서 그는 평범한 웨이트리스였다. 하지만 2편에서는 완전히 전사로 재탄생한다. 근육질 몸, 단단한 눈빛, 군인 못지않은 무기 사용 능력. 린다 해밀턴이 실제로 몇 달 동안 고강도 근력 운동과 무기 훈련을 받았다고 하는데, 그 노력이 그대로 스크린에 드러난다.
사라는 탈출 기회를 포착하고 간수들을 제압해 정신병원을 빠져나가려 한다. 복도 끝에서 T-1000과 마주치는 순간, 그녀의 얼굴이 굳는다. 그 사이로 또 다른 익숙한 실루엣이 나타난다. T-800이다. 11년 전 자신을 죽이려 했던 그 얼굴 그대로. 사라는 비명을 지르며 뒷걸음질 친다. 그때 존이 외친다.
"엄마, 괜찮아. 쟤는 이번엔 우릴 지키러 온 거야."
사라로서는 도무지 믿기 어려운 말이다. 자신과 아들을 보호해줄 존재가 하필 1편의 악몽 같은 그 로봇이라니. 그러나 선택지는 없다. T-1000이 바로 뒤까지 쫓아오고 있고, 살아남으려면 이 ‘기계’와 손을 잡을 수밖에 없다.
운명은 정해지지 않았다
모텔에 몸을 숨긴 뒤, T-800은 스스로 팔을 열고 손상된 부분을 수리한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존이 묻는다.
"넌 사람들이 왜 우는지 알아?"
T-800이 답한다. "육체적인 현상은 이해하지만, 감정적인 이유는 알 수 없다."
존이 말한다. "사람들은 슬프니까 우는 거야."
이 대화가 이 영화의 중요한 축을 이룬다. 기계가 인간에 대해 배우는 과정, 그리고 감정이라는 영역을 조금씩 이해해 가는 과정이 여기서 시작된다. 알고 보니 T-800은 원래 학습 기능을 가지고 있었지만, 스카이넷이 그 기능을 막아둔 상태였다. 존은 T-800의 두뇌 칩을 분리해 ‘학습 모드’를 다시 활성화하고, 이제 터미네이터는 진짜로 ‘배우는’ 존재가 된다.
한편 사라는 다른 결론에 도달한다. 심판의 날을 막으려면, 스카이넷의 탄생 자체를 없애야 한다. 그 열쇠는 마일스 다이슨(조 모턴)이라는 인물에게 있다. 사이버다인 시스템즈의 천재 엔지니어인 그는, 1편에서 회수된 T-800의 팔과 칩을 바탕으로 신경망 프로세서를 개발하고 있었고, 그것이 훗날 스카이넷의 기반이 된다.
사라는 혼자 다이슨의 집까지 찾아가 소총을 겨눈다. 창밖으로 가족들과 장난치는 다이슨의 모습이 보이지만, 방아쇠를 당기려는 손은 멈추지 않는다. 그 순간, 다이슨의 아들이 아버지를 감싸며 울먹인다. 사라는 결국 총을 떨어뜨리고 무너져 내린다. 아무리 미래를 위해서라 해도, 눈앞의 사람을 직접 죽이는 일을 끝내 하지 못한다.
이때 존과 T-800이 도착해 다이슨에게 모든 진실을 털어놓는다. 미래 전쟁, 스카이넷, 그리고 자신이 만든 기술이 인류를 어디로 몰고 갈지에 대해. 말을 믿지 못하는 다이슨에게 T-800은 팔의 피부를 벗겨 금속 골격을 그대로 드러내 보인다. 이보다 더 확실한 증거는 없다. 다이슨은 충격 속에서, 결국 자신의 연구를 스스로 파괴하기로 결심한다.
최후의 전투
사라는 다이슨, 존, T-800과 함께 사이버다인 본사에 침입한다. 금고 속에 보관된 T-800의 칩과 팔, 그리고 모든 자료를 폭파시키기 위해서다. 야간에 벌어지는 이 침입 장면은 긴장감과 디테일이 뛰어나다.
곧 경찰과 SWAT 팀이 건물을 포위한다. T-800이 시간을 벌기 위해 1층 로비로 내려가는데, 이때 액션 연출이 다시 한 번 빛난다. 그는 소총과 미니건을 난사하지만, 존의 명령 때문에 절대 사람을 죽이지는 않는다. 차량과 장비만 파괴하고, 사람은 다리만 쏴서 전원 ‘비치사’로 제압한다. 로봇이 인간에게서 생명의 가치를 배워가는 장면이기도 하다.
다이슨은 기폭 장치를 손에 쥔 채, 마지막까지 남아 시간을 번다. 총격을 맞아 숨이 넘어가는 와중에도, 그는 "이제… 다 됐어요…"라는 말과 함께 기폭 장치를 떨어뜨리고, 엄청난 폭발과 함께 사이버다인은 잿더미가 된다. 스카이넷의 원천은 이론상 모두 사라진 셈이다.
하지만 T-1000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헬리콥터를 탈취해 추격을 이어가고, 액체 질소 트럭과 함께 이어지는 도로 추격전 끝에, 최종 결전의 장소인 제철소에 도착한다. 뜨거운 쇠물과 증기가 가득한 이 공간에서 구형 T-800과 신형 T-1000의 마지막 대결이 펼쳐진다.
T-1000은 확실히 더 강하다. 여러 번 박살이 나도 다시 붙고, T-800을 쇠창에 꿰뚫어 거의 작동 불능 상태로 만든다. 사라와 존은 끝까지 쫓기며 후퇴하다가, 끓는 쇠물 구덩이 앞까지 몰린다.
그 순간, 한 번 더 살아나는 존재가 있다. T-800이다. 예비 전원이 작동하면서, 그는 마지막 힘을 짜내 유탄 발사기로 T-1000을 쇠물 속으로 날려 보낸다. 끓어오르는 쇠물 속에서 T-1000은 지금까지 변신했던 수많은 모습으로 몸이 일그러지다가 결국 완전히 녹아 사라진다. 긴 악몽이 끝나는 순간이다.
기계가 인간에게 배운 것
위기는 끝났지만, 아직 한 가지가 남아 있다. 1편에서 회수된 칩과 팔은 파괴했지만, 사실 T-800 자신도 미래에서 온 ‘증거’다. 그 역시 이 세계에 남아 있는 한 또 다른 사이버다인의 씨앗이 될 수 있다.
T-800은 스스로 답을 내린다. "나도 파괴되어야 한다."
존은 필사적으로 말린다. "안 돼! 넌 죽으면 안 돼!"
하지만 T-800은 조용히 말한다. "이제는 이해한다. 네가 왜 우는지. 하지만 나는 울 수 없다."
사라는 침묵 속에서 그 말의 의미를 받아들인다. 그리고 스스로 체인을 조작해 T-800을 쇠물 속으로 내려 보낸다. T-800은 마지막 순간까지 존을 올려다보며, 엄지손가락을 치켜든다. 그것이 이 ‘기계’가 할 수 있는 최후의 인사이자, 한 인간 소년에 대한 애정 표현이다. 그리고 서서히 쇠물 속에 잠기며 사라진다.
마지막 장면에서 사라는 고속도로를 달리며 하늘을 올려다본다. 어두웠던 미래의 비전은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대신, 열린 도로와 함께 희미한 희망이 보인다. 그녀의 내레이션이 흐른다.
"미래는 정해져 있지 않다. 미래는 우리가 만들어 가는 것이다. 이제 나는 처음으로 미래를 희망으로 바라본다. 우리가 오늘 배운 것을 잊지 않는다면 말이다."
액션 영화의 교과서
‘터미네이터 2’는 액션 영화의 정점이라는 말을 쉽게 붙여도 될 정도다. 추격전, 총격전, 근접전, 폭발씬까지 어느 하나 허투루 넘어가는 장면이 없다. 제임스 카메론은 액션을 단순히 ‘볼거리’로만 찍지 않는다. 캐릭터의 감정과 서사가 액션 속에 녹아들어 있기 때문에, 관객은 화면 속 인물의 운명을 진짜로 걱정하게 되고, 그래서 긴장감이 배가된다.
제철소 시퀀스가 그 대표적인 예다. 어둡고 뜨거운 공간, 들끓는 쇠물, 쉴 새 없이 움직이는 기계들, 그 속에서 살아남으려 몸부림치는 사람들. 대부분 실제 장소에서 실제 장비를 사용해 촬영했기 때문에, 화면에서 느껴지는 열기와 위험이 피부로 전해진다.
T-1000의 CGI는 지금 봐도 놀랍다. 액체 금속이 총알 구멍을 메우고, 바닥과 하나가 되었다가 다시 인간의 형체로 솟아오르고, 쇠창살 사이를 흘러 지나가는 장면들은 당시로서는 상상조차 어려운 수준이었다. ILM이 반년 넘게 매달려 렌더링했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다. 여기에 스탠 윈스턴 팀의 실물 특수효과, 예를 들어 실제로 제작한 로봇 골격과 손상된 인체 모형이 더해지면서, CG와 아날로그 특수효과가 절묘하게 섞여 현실감을 살렸다.
여전히 현재형인 메시지
이 영화가 30년이 지나도 전혀 낡아 보이지 않는 이유는, 단지 액션과 기술 때문만은 아니다. 이야기 자체가 지금 시대에도 그대로 통하기 때문이다. ‘기계가 인간을 지배한다’는 설정은 이제 더 이상 먼 미래의 공상으로만 느껴지지 않는다. 인공지능, 자율주행, 로봇 공학이 빠르게 발전하는 지금, 스카이넷의 그림자는 어딘가 실제의 문제처럼 다가온다.
카메론 감독이 던지는 질문은 단순하다. 기술은 계속 발전하는데, 그걸 사용하는 인간의 지혜도 함께 성장하고 있느냐는 것이다. AI가 자각을 하느냐 마느냐보다 더 중요한 건, 우리가 기술을 어디까지 허용하고 어떻게 통제할 것인지에 대한 선택이다.
그래서 영화는 결국 ‘운명’이 아니라 ‘선택’을 강조한다.
사라는 결국 다이슨을 쏘지 않기로 ‘선택’했고, 다이슨은 자신의 연구를 불태우기로 ‘선택’했으며, 존은 T-800에게 절대 사람을 죽이지 말라고 ‘명령’했다. 심지어 기계인 T-800조차, 스스로 파괴되기로 ‘결정’한다. 이 모든 선택이 모여 심판의 날을 막는다.
마치며
‘터미네이터 2’를 다시 볼 때마다 감탄하게 된다. 30년이 넘었는데도 액션은 여전히 최고 수준이고, 특수효과는 여전히 설득력이 있으며, 이야기와 메시지는 지금 세대에게도 충분히 통한다.
이후에 ‘터미네이터 3’, ‘미래 전쟁의 시작’, ‘제니시스’, ‘다크 페이트’ 등 여러 속편이 나왔지만, 2편을 넘어선 작품은 없었다. 사실 2편에서 이미 이야기의 완벽한 마침표가 찍혀버렸기 때문이기도 하다. 더 이어갈 이야기가 남아 있지 않았던 셈이다.
딸아이가 고등학생쯤 되면 이 영화를 꼭 함께 보고 싶다. 폭력적인 장면이 있긴 하지만, 기술에 대한 책임, 미래에 대한 선택, 희생의 의미 같은 중요한 질문들을 던져주는 영화다. 그냥 ‘옛날 액션 영화’로 소비되기에는 아까운 작품이다.
T-800은 1편에서 "I’ll be back."을 거친 위협으로 던졌고, 2편에서는 묵직한 약속으로 다시 한 번 말한다. 실제로 그는 돌아왔고, 구했고, 결국 자신을 희생했다.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로봇. 아이러니하지만, 이 기계는 오히려 인간에게 인간다움이 무엇인지 가르쳐준다. 그게 바로 ‘터미네이터 2’가 가진 진짜 마법이다.
Hasta la vista, baby.
영화 정보
- 제목: Terminator 2: Judgment Day (터미네이터 2)
- 개봉: 1991년
- 감독: 제임스 카메론
- 출연: 아놀드 슈워제네거, 린다 해밀턴, 에드워드 펄롱, 로버트 패트릭
- 음악: 브래드 피델
- 장르: SF, 액션
- 러닝타임: 137분 (극장판), 154분 (확장판)
- 평점: ★★★★★ (5/5)
이런 분들께 추천합니다
- 완벽한 액션 영화를 보고 싶은 분
- 혁신적인 특수효과에 관심 있는 분
- 제임스 카메론 감독의 팬
- AI와 기술의 미래에 대해 생각하고 싶은 분
- 영화 역사의 명작을 경험하고 싶은 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