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0년, 혼자라는 것의 의미
‘캐스트 어웨이’를 극장에서 처음 봤을 때, 가장 놀랐던 건 중간에 대사가 거의 없는데도 전혀 지루하지 않다는 점이었습니다.
톰 행크스는 무인도에서 한 시간 넘게 혼자 지내고, 대화 상대라고는 배구공 윌슨뿐인데도, 오히려 숨을 죽이고 보게 되더군요. 한 인간이 극한 상황에서 어떻게 살아남고, 고독과 어떻게 싸우는지를 너무 생생하게 보여줬습니다.
로버트 저메키스 감독은 ‘포레스트 검프’에 이어 다시 한 번 톰 행크스와 손을 잡았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완전히 다른 영화였습니다. 화려한 특수효과도, 시대를 아우르는 거대한 서사도 없습니다. 그냥 한 남자와 섬, 그리고 시간뿐입니다.
톰 행크스의 영화를 위한 준비가 철저했던것으로 유명합니다. 영화 중간에 무려 1년 동안 촬영을 중단하고 23kg을 감량한 뒤, 머리와 수염을 기른 상태로 다시 카메라 앞에 섰습니다. 통통하고 건강한 직장인이 앙상하고 거친 조난자로 변해가는 모습은 그야말로 충격적이었습니다.
영화를 본 뒤 며칠 동안 이런 생각이 머릿속을 맴돌았습니다.
“만약 나라면 어땠을까? 무인도에 혼자 남겨진다면 버틸 수 있을까?”
솔직히 말해 저는 첫 주도 버티기 힘들 것 같습니다. 하지만 척 놀랜드는 4년을 버팁니다. 어떻게 그게 가능했을까요?
시간에 쫓기던 남자
영화 초반의 척 놀랜드는 전형적인 현대인입니다. 페덱스 시스템 엔지니어로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배송 효율을 높이는 일을 하죠. 그에게 시간은 곧 돈이었습니다.
“시간을 지배하는 자가 미래를 지배한다.”
그가 믿는 신조였습니다. 회의 중에도 손목시계를 힐끔거리고, 크리스마스 이브에도 일 때문에 러시아로 떠나야 했습니다.
약혼녀 켈리(헬렌 헌트)와의 관계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사랑하지만 늘 시간이 없었습니다. 크리스마스 선물로 약혼반지를 준비해놓고도 비행기 시간 때문에 제대로 건네지 못합니다. 차 안에서 서둘러 상자를 주며 “돌아오면 열어봐”라고 말하고 떠나버리죠. 켈리는 서운한 표정을 짓지만, 척은 이미 시계를 보고 있습니다.
일상을 바쁘게 살아가는 우리들 특히 대한민국의 엄마 아빠들은 척과 비슷하게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학생들도 비슷하죠. 학원 끝나고 과외 가고, 주말에는 특강 듣고, 항상 시간에 쫓기는 아이들.
학원에서는 아이들과 상담할때 가끔 물어봅니다. “힘들지 않아?”
그러면 돌아오는 대답은 비슷합니다. “괜찮아요. 익숙해요.”
익숙하다는 말이 오히려 더 슬플 때가 있습니다. 척도 그랬겠죠. 쫓기는 삶에 익숙해진 사람.
추락과 생존의 시작
비행기는 폭풍우를 만납니다. 화물기지만 승무원들이 타고 있었고, 난기류가 심해지면서 기체가 거칠게 흔들립니다. 결국 추락. 이 장면이 정말 무서웠던 이유는, 요란한 음악 대신 현실적인 공포만 담담하게 보여줬기 때문입니다. 물속으로 가라앉는 기체, 빠져나가려 애쓰는 척,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 바다.
간신히 구명보트에 매달려 표류하던 척은 아침이 되어 작은 섬 하나를 발견합니다. 살아남았지만 이제부터 시작이기도 합니다.
처음엔 당연히 구조를 기다립니다. 해변에 큰 글씨로 ‘HELP’를 써놓고, 하늘을 올려다보며 비행기가 지나가길 기다립니다. 하지만 아무도 오지 않습니다. 하루, 이틀, 일주일이 지나도 마찬가지입니다.
물이 필요해 야자수를 발견하지만, 따는 것조차 쉽지 않습니다.
돌을 던져보고, 나무에 올라가다 떨어지고, 결국 막대기로 두드려 떨어뜨려 겨우 마십니다.
불도 필요합니다. 영화에서 본 대로 나무를 비벼보지만 쉽게 되지 않습니다. 손에 물집이 잡히고, 며칠을 시도한 끝에 마침내 불이 붙는 순간, 척은 원시인처럼 환호합니다.
“내가 불을 만들었어! 내가 했어!”
영화는 이 과정을 대충 넘어가지 않습니다. 얼마나 많이 실패하고, 얼마나 고통스럽게 하나씩 배워가는지 차근차근 보여줍니다. 그래서 더 현실적이고, 더 몰입하게 됩니다.
윌슨, 유일한 친구
어느 날 해변에 페덱스 화물 상자들이 떠밀려옵니다. 척은 하나씩 뜯어봅니다. 비디오테이프, 드레스, 아이스 스케이트. 당장 생존에는 별로 쓸모없어 보이는 물건들입니다. 그러다 한 상자에서 배구공 하나가 나옵니다. 윌슨 브랜드의 공.
우연히 손을 다쳐 피가 난 날, 화가 난 척은 배구공을 내던지고, 그 공에 피 묻은 손자국이 얼굴처럼 남습니다. 척은 그 위에 눈, 코, 입을 그려넣고 이름을 붙입니다. “윌슨.”
처음에는 우스꽝스럽게 보이기도 합니다. 배구공에게 말을 거는 남자라니.
하지만 점점 이해하게 됩니다. 인간은 결국 혼자 살 수 없는 존재라는 걸요. 누군가와 대화하고, 생각을 나누고, 감정을 쏟아낼 대상이 필요합니다. 윌슨이 없었다면 척은 진작 무너졌을지도 모릅니다.
딸아이가 어렸을 때 인형에게 말을 걸던 모습이 떠오릅니다.
“곰돌아, 오늘 유치원 재밌었어.”
그땐 그저 귀엽다고만 생각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게 바로 소통하고 싶은 인간의 본능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척에게 윌슨은 그저 배구공이 아니었습니다. 친구였고, 위안이었고, 살아갈 이유 중 하나였습니다.
시간의 의미가 바뀌다
무인도에서 시간은 전혀 다른 얼굴을 합니다. 처음에 척은 벽에 표시를 하며 날짜를 세어 나갑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게 큰 의미가 없어집니다. 오늘이 월요일인지 금요일인지 알 필요가 없습니다. 크리스마스가 지나가도, 새해가 와도 모릅니다.
대신 다른 시간들이 중요해집니다. 해가 뜨는 시간, 해가 지는 시간, 물때, 계절의 변화.
척은 점점 자연의 리듬에 맞춰 살아갑니다. 문명의 시간에서 자연의 시간으로 옮겨가는 것이죠.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 중 하나가, 척이 아무 말 없이 일몰을 바라보고 있는 장면입니다. 예전 같았으면 스마트폰을 보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아니, 바빠서 일몰을 볼 시간 자체가 없었겠죠. 하지만 섬에서의 하루 중 가장 큰 이벤트가, 해가 지는 그 순간이 됩니다.
요즘 영화들은 보통 빠릅니다. 2~3분마다 사건이 일어나 관객의 집중을 붙잡아두려 합니다.
하지만 ‘캐스트 어웨이’는 느립니다. 그렇기에 설득력이 있습니다. 척의 시간이 느려졌고, 관객도 그 속도에 맞춰야 했기 때문입니다.
탈출의 결심
4년이 지나, 척의 모습은 완전히 달라져 있습니다. 수염은 덥수룩하고, 피부는 새까맣게 타 있고, 몸은 앙상하게 변했습니다. 그러나 눈빛만은 살아 있습니다.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플라스틱 판자 하나가 떠밀려옵니다. 척은 이걸로 뗏목을 만들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통나무를 모으고, 묶고, 돛을 만들고, 수차례 고치고 시험합니다. 몇 달에 걸친 작업 끝에 드디어 출발 준비를 마칩니다.
드디어 바다로 나가는 날, 윌슨도 함께입니다. 깊은 바다로 나선 뗏목은 거센 파도와 폭풍에 시달리고, 한밤중 폭풍 속에서 윌슨이 바다로 떨어져 나갑니다. 척은 필사적으로 쫓아가며 외칩니다.
“윌슨! 윌슨!”
손을 뻗지만 닿지 않습니다. 윌슨은 점점 멀어지고, 척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합니다.
“미안해, 윌슨. 미안해…”
배구공 하나를 떠나보내는 장면에 눈물이 나는 경험을 하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하지만 그건 단순한 물건이 아니라 4년을 함께 보낸 유일한 동료를 잃는 순간이었습니다.
이튿날, 탈진한 채 뗏목 위에 누워 있는 척 앞에 한 화물선이 나타납니다. 마침내 구조됩니다.
돌아온 세상, 낯선 현실
병원에서 깨어난 척은 이미 5년이 지났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모두가 그가 죽은 줄 알았고, 장례식까지 마친 뒤였습니다. 켈리는 재혼했고, 아이까지 있습니다. 척이 없는 시간을, 나름대로 살아낸 것이죠.
둘은 비 내리는 밤, 차 안에서 다시 마주합니다. 할 말이 너무 많지만, 동시에 말이 나오지 않습니다. 켈리는 울면서 말합니다.
“당신을 잃었어요. 정말로 잃었어요.”
척도 알고 있습니다. 자신이 돌아왔지만, 예전의 자리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켈리는 여전히 척을 사랑하지만, 이미 다른 사람의 아내이자 아이의 엄마입니다. 두 사람은 마지막 키스를 나누고, 조용히 각자의 자리로 돌아갑니다.
이 장면이 참 아팠습니다. 살아 돌아왔지만 돌아갈 곳은 없어져 버린 사람.
척은 살아남았지만, 예전의 삶은 이미 남의 이야기가 되어 있었습니다.
삶은 계속된다
영화의 마지막, 텍사스의 넓은 들판 한가운데서 척은 네 갈래로 갈라진 교차로에 서 있습니다. 어디로 가야 할까요?
무인도에서 척은 천사 날개가 그려진 페덱스 상자 하나를 끝까지 열지 않고 남겨두었습니다. 언젠가는 이 상자의 주인에게 돌려주겠다는 생각이, 그에게 하나의 목표이자 살아갈 이유가 됩니다. 마침내 그 농장을 찾아 상자를 돌려주러 왔지만, 주인은 집에 없고 메모만 남긴 채였습니다.
되돌아가려는 순간, 픽업트럭 한 대가 농장으로 들어옵니다. 그 트럭 뒤에도 천사 날개 그림이 있습니다. 상자와 같은 그림입니다. 잠깐 대화를 나눈 뒤 여자는 떠나고, 척은 다시 교차로에 홀로 남습니다. 네 방향을 바라보고, 마지막에 여자가 떠난 방향을 힐끔 본 뒤 미소를 짓습니다. 영화는 그 장면에서 끝납니다.
척이 어느 길을 선택했는지 영화는 알려주지 않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건 이제는 선택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무인도에서는 선택지가 없었습니다. 그저 “살아남는 것”밖에 없었습니다.
이제는 어디로 갈지, 어떻게 살지 스스로 정할 수 있습니다. 그 자유 자체가 소중해 보입니다.
고독과 자유에 대하여
‘캐스트 어웨이’는 생존 영화이면서 동시에 철학적인 영화입니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문명을 다 빼앗기면 우리에게 무엇이 남는가?”
“시간의 의미와 삶의 가치는 어디에서 오는가?”
척은 거의 모든 것을 잃습니다. 가족, 친구, 직장, 약혼녀. 무인도에서는 이름조차 큰 의미가 없습니다. 그는 그냥 ‘살아남은 자’일 뿐입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살아있다는 것 자체의 가치를 새로 발견합니다.
영화 속에는 척이 자살을 시도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로프를 만들어 목을 매보지만 로프가 끊어지고, 그는 살아남습니다. 그 이후 척은 이렇게 깨닫습니다.
“숨을 쉬는 한 희망은 있다. 내일, 아니 모레쯤 뭐가 떠밀려올지 누가 아나.”
우리도 비슷한 순간이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모든 게 끝난 것 같은 날, 희망이 하나도 보이지 않는 날. 그럼에도 어쨌든 하루를 견디며 살아갑니다. 왜일까요?
언젠가, 어딘가에서, 무언가 좋은 일이 떠밀려올지도 모른다는 희미한 기대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톰 행크스의 1인극
이 모든 이야기를 가능하게 만든 건 결국 톰 행크스의 연기입니다. 영화 대부분을 혼자 이끌어가야 했고, 대사도 많지 않았습니다. 표정과 몸짓만으로 희망, 절망, 외로움, 각오, 기쁨, 슬픔을 다 보여줘야 했습니다. 그 감정들이 관객에게 고스란히 전해집니다.
특히 신체적인 변화가 주는 설득력은 엄청납니다.
영화 초반의 통통한 회사원에서 후반부의 앙상한 생존자로 변하기까지, 실제로 1년을 들여 몸을 만들었다는 사실이 화면에서도 느껴집니다.
헬렌 헌트의 분량은 많지 않지만, 켈리라는 인물을 통해 ‘남겨진 사람’의 고통과 복잡한 감정을 설득력 있게 전달합니다. 마지막 재회 장면에서 두 사람이 보여주는 연기는, 대사보다 침묵이 더 많은 걸 말해준다는 걸 보여줍니다.
마치며
‘캐스트 어웨이’를 보고 나면 일상이 조금 다르게 보입니다.
수돗물을 틀면 물이 나온다는 것, 스위치를 누르면 불이 켜진다는 것, 가족이 옆 방에서 자고 있다는 것. 이런 너무 당연해서 신경조차 쓰지 않던 것들이 사실은 얼마나 큰 축복인지 새삼 느끼게 됩니다.
척은 4년 동안 완전히 혼자였습니다. 우리는 대부분 철저하게 혼자인 적이 없습니다. 늘 누군가 곁에 있습니다. 가족, 친구, 동료. 그래서 고마움을 잘 느끼지 못합니다. 하지만 그건 결코 당연한 일이 아니라, 어쩌면 굉장한 행운일지도 모릅니다.
요즘은 ‘혼자’가 하나의 트렌드처럼 소비됩니다. 혼밥, 혼술, 혼영. 저도 가끔 혼자 있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캐스트 어웨이’를 보고 나면 이런 생각이 듭니다.
우리가 말하는 혼자와, 섬에 고립된 척의 혼자는 전혀 다른 종류의 것이라고.
선택해서 하는 혼자와, 선택할 수 없는 고립은 같지 않으니까요.
무인도에서 돌아온 뒤, 척은 네 갈래 길 앞에 서서 어디로 갈지 선택해야 합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매일 자기만의 교차로 앞에 서서 선택을 합니다.
어떻게 살지, 누구와 함께할지. 그 선택들이 모여 결국 ‘나’라는 사람을 만들어 갑니다.
척이 무인도에서 배운 건 생존 기술만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작은 것에 감사하는 법, 살아있음에 감사하는 법이었겠죠.
우리도 너무 바쁘게 사느라 정작 중요한 걸 놓치고 있는 건 아닌지, 문득 돌아보게 됩니다.
시계를 보니 밤 11시. 내일은 아침 일찍 학원에 가야 합니다. 그래도 딸 방에 살짝 들어가 이불을 한 번 더 덮어줍니다. 자는 얼굴을 바라보며 생각합니다.
“이 평범한 일상이, 참 고맙다.”
영화 정보
- 제목: Cast Away (캐스트 어웨이)
- 개봉: 2000년
- 감독: 로버트 저메키스
- 출연: 톰 행크스, 헬렌 헌트
- 음악: 앨런 실베스트리
- 장르: 드라마, 어드벤처
- 러닝타임: 143분
- 평점: ★★★★★ (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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