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침마다 리셋되는 삶
나이가 먹으니 건망증이 심해졌다. 학생들을 가르치다가도 가끔은 단어가 생각나지 않을때가 있기도하다. 어느날은 아침에 일어나면 전날 일이 가물가물할 때가 있다. 특히 피곤했던 날은 더 그렇다. 그런데 만약 정말로 매일 아침 기억이 완전히 리셋된다면 어떨까? '50 First Dates(첫 키스만 50번째, 2004)'는 바로 그런 상상에서 출발한 영화다.
하와이, 완벽한 배경
헨리 로스는 하와이 수족관에서 일하는 수의사다. 아담 샌들러가 연기했는데, 그의 코미디 영화 중에서는 상당히 로맨틱한 축에 속한다. 헨리는 바다사자들을 돌보면서 여유로운 삶을 살고 있다.
그는 관광객 여자들과 짧은 만남을 즐긴다. 진지한 관계는 피한다. 어차피 관광객들은 떠나니까. 그렇게 가볍게 살아가던 헨리가 어느 날 카페에서 루시를 만난다.
루시는 매일 아침 같은 카페에 와서 와플을 먹는다. 드류 베리모어가 연기했는데, 밝고 사랑스럽다. 헨리는 그녀에게 한눈에 반한다. 용기를 내서 말을 걸고, 둘은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헨리는 이 여자가 특별하다고 확신한다.
다음 날 아침, 헨리는 다시 그 카페로 간다. 루시를 보고 반갑게 인사한다. 하지만 루시는 그를 전혀 모른다. 완전히 초면인 것처럼 대한다. 헨리는 당황한다.
카페 주인이 헨리를 불러 설명한다. 루시는 단기 기억상실증을 앓고 있다. 1년 전 교통사고로 뇌손상을 입었고, 그 후로 잠을 자면 하루의 기억이 모두 사라진다. 매일 아침 일어나면 사고 전날인 10월 13일이라고 생각한다.
매일 첫 만남을 반복하는 남자
헨리는 포기할 수 없다. 루시를 진심으로 좋아하게 됐으니까. 그래서 매일 아침 카페로 가서 루시에게 말을 건다. 매번 다른 방식으로, 다른 이야기로. 어제 통했던 농담이 오늘은 안 통할 수도 있으니까.
이 설정이 코미디로 풀린다. 헨리가 매번 다른 접근법을 시도하는 장면들이 웃긴다. 한번은 록스타인 척하고, 한번은 영국 억양을 쓰고, 한번은 그냥 솔직하게. 성공하기도 하고 실패하기도 한다.
루시의 가족들은 딸을 보호하기 위해 매일 10월 13일을 재현한다. 아빠 마를린(블레이크 클라크)과 오빠 더그(션 애스틴)는 매일 아침 똑같은 신문을 준비하고, 똑같은 TV 프로그램을 녹화해서 틀어준다. 생일 파티 준비를 하는 척한다. 루시가 진실을 알면 충격받을까 봐.
헨리는 이 가족을 설득한다. 루시에게 진실을 말해야 한다고. 매일 거짓으로 사는 건 진짜 삶이 아니라고. 결국 루시는 진실을 알게 된다.
비디오테이프, 자신에게 남긴 메시지
루시가 진실을 받아들이는 장면이 가슴 아프다. 매일 아침 일어나서 자신이 10살은 더 늙었다는 걸 깨닫는다. 거울을 보고 낯선 자신의 얼굴을 본다. 1년치 기억이 통째로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하지만 루시는 강한 여자다. 그녀는 비디오테이프를 만들기 시작한다. 자신이 자신에게 남기는 메시지. 매일 아침 일어나서 이 테이프를 본다. 사고 이후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지금 자신의 삶이 어떤지 설명하는 영상.
헨리도 그 테이프에 등장한다. 자신을 소개하고, 루시와 어떻게 만났는지 설명한다. 매일 아침 루시는 이 테이프를 보고 헨리의 존재를 알게 된다. 어제의 자신이 오늘의 자신에게 헨리를 사랑한다고 말해준다.
이 설정이 정말 영리하다. SF적 요소지만 감정적으로 와닿는다. 루시는 헨리를 기억하지 못하지만, 매일 아침 자신이 남긴 증거를 통해 그를 믿게 된다. 일종의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이다.
사랑의 방식, 헨리의 결단
헨리는 고민한다. 이게 진짜 사랑일 수 있을까? 루시는 매일 아침 자신을 잊는다. 함께 쌓아온 추억도, 나눈 대화도, 모든 것이 사라진다. 그래도 계속할 수 있을까?
친구들은 만류한다. 너무 힘들 거라고. 하지만 헨리는 포기하지 않는다. 매일 아침 새로운 방식으로 루시에게 다가간다. 그림을 그려주고, 노래를 불러주고, 함께 시간을 보낸다.
재미있는 건 루시가 무의식적으로 헨리를 기억한다는 거다. 꿈속에서 헨리의 얼굴을 보고, 깨어나서 그를 그린다. 기억은 사라져도 감정은 남아있는 것처럼. 뇌가 잊어도 마음은 기억하는 것처럼.
어느 날 루시가 결정한다. 헨리를 떠나보내기로. 자신 때문에 헨리의 삶이 망가지는 걸 원하지 이 않는다. 그는 알래스카로 가서 바다코끼리 연구를 하고 싶어 했다. 자신이 그 꿈을 막고 있다고 생각한다.
루시는 헨리에게 거짓말한다. 자신에게 다른 남자친구가 생겼다고. 헨리는 상처받는다. 하지만 루시의 진심을 모를 리 없다. 그래도 그녀의 결정을 존중한다.
알래스카 선상에서의 아침
영화는 몇 년 후로 넘어간다. 헨리는 배를 타고 있다. 알래스카 바다 위에서 바다코끼리를 연구하는 배다. 그의 꿈을 이뤘다.
한 여자가 선실에서 깨어난다. 루시다. 그녀는 낯선 배 안에서 당황한다. 테이블 위에 비디오 플레이어와 테이프가 놓여 있다. 재생 버튼을 누른다.
화면에 자신이 등장한다. 그리고 헨리가 등장한다. 아이도 있다. 자신의 딸이다. 테이프는 설명한다. 당신은 결혼했고, 딸이 있고, 지금 알래스카로 가는 배에 타고 있다고.
루시가 갑판으로 올라간다. 헨리와 딸이 빙하를 바라보고 있다. 루시가 다가간다. 헨리가 돌아보며 미소 짓는다. "안녕하세요." 루시도 미소 짓는다. 테이프를 봤으니까. 이 남자가 누군지, 이 아이가 누군지 안다.
매일 아침 루시는 처음부터 시작한다. 하지만 테이프를 보고, 자신의 삶을 받아들이고, 가족을 사랑한다. 기억은 없어도 사랑은 매일 새롭게 시작된다.
단기 기억상실증, 실제로 가능한가
영화를 보면서 궁금해진다. 이런 증상이 실제로 존재하나? 단기 기억상실증은 실제 의학 용어다. 새로운 기억을 형성하지 못하는 증상. 대표적인 사례가 H.M.이라는 환자인데, 뇌수술 후 새로운 장기 기억을 만들지 못했다.
물론 영화는 과장됐다. 실제로는 잠을 자면 정확히 리셋되는 식은 아니다. 하지만 영화적 장치로서 효과적이다. 관객이 쉽게 이해할 수 있고, 감정적으로 몰입할 수 있으니까.
중요한 건 과학적 정확성이 아니라 영화가 던지는 질문이다. 기억이 없어도 사랑할 수 있을까? 과거가 없어도 관계를 만들 수 있을까? 매일 리셋되는 삶에도 의미가 있을까?
영화는 긍정적으로 대답한다. 그렇다고. 루시는 매일 아침 새로 시작하지만, 자신이 남긴 기록을 믿는다. 헨리는 매일 다시 사랑을 증명해야 하지만, 기꺼이 그렇게 한다. 그들의 사랑은 기억이 아니라 선택이다.
아담 샌들러와 드류 베리모어, 완벽한 조합
아담 샌들러와 드류 베리모어는 이 영화 전에 '웨딩 싱어(The Wedding Singer, 1998)'에서도 호흡을 맞췄다. 두 배우의 케미스트리가 좋다. 아담 샌들러의 장난기 많은 유머와 드류 베리모어의 밝은 에너지가 잘 어울린다.
아담 샌들러는 주로 코미디 영화에 출연하지만, 이 영화에서는 로맨틱한 면도 보여준다. 루시를 바라보는 눈빛이 진심으로 느껴진다. 매일 새로 시작하는 사랑을 포기하지 않는 남자의 모습이 설득력 있다.
드류 베리모어는 루시의 밝은 면과 슬픈 면을 모두 표현한다. 매일 아침 진실을 알게 되는 장면, 거울을 보고 충격받는 장면, 헨리를 떠나보내려는 장면. 그녀의 연기가 영화를 감동적으로 만든다.
하와이 로케이션도 영화의 큰 장점이다. 아름다운 해변, 푸른 바다, 수족관, 카페. 밝고 화사한 배경이 무거울 수 있는 소재를 가볍게 만든다. 비극이 될 수 있는 이야기를 로맨틱 코미디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
매일 아침, 다시 시작하는 용기
'50 First Dates'는 단순히 로맨틱 코미디가 아니다. 매일을 새롭게 시작하는 것에 대한 영화다. 루시는 매일 아침 자신의 삶을 다시 받아들인다. 헨리는 매일 루시에게 자신을 증명한다.
어떻게 보면 우리도 비슷하지 않을까? 매일 아침 일어나서 어제와 똑같은 하루를 산다. 루틴이 반복되고, 같은 사람들을 만나고, 비슷한 일을 한다. 하지만 그 안에서도 매 순간은 새로운 선택이다.
사랑도 마찬가지다. 한 번 사랑에 빠졌다고 끝이 아니다. 매일 상대를 다시 선택하는 거다. 어제의 사랑이 오늘도 유효한지 확인하는 거다. 루시처럼 기억이 리셋되지는 않지만, 감정은 변할 수 있으니까.
영화의 메시지는 희망적이다. 기억이 사라져도, 매일 리셋되어도, 사랑은 가능하다. 진심은 전달된다. 그리고 함께하기로 선택한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마치며
'50 First Dates'를 보고 나면 마음이 따뜻해진다. 코미디 영화로 시작했지만, 끝에는 감동이 남는다. 가볍게 웃다가도 마지막에는 눈시울이 붉어진다.
아담 샌들러의 영화 중에서 가장 로맨틱한 작품 중 하나다. 그의 다른 코미디 영화들처럼 과장된 개그가 있지만, 핵심은 진심 어린 사랑 이야기다. 드류 베리모어와의 케미스트리도 완벽하다.
하와이의 아름다운 풍경, 경쾌한 레게 음악, 밝은 분위기. 모든 게 기분 좋은 영화 경험을 만든다. 무거운 주제를 다루지만 절대 우울하지 않다. 오히려 희망적이고 긍정적이다.
만약 가벼운 마음으로 볼 수 있는 로맨틱 코미디를 찾는다면, 혹은 조금은 특별한 사랑 이야기를 원한다면 이 영화를 추천한다. 보고 나면 당신도 누군가에게 매일 새롭게 사랑을 증명하고 싶어질지도 모른다.
매일 아침은 새로운 시작이다. 어제의 기억이 있든 없든.
영화 정보
- 제목: 50 First Dates (첫 키스만 50번째)
- 개봉: 2004년
- 감독: 피터 시걸
- 출연: 아담 샌들러, 드류 베리모어, 롭 슈나이더, 션 애스틴
- 장르: 로맨틱 코미디
- 러닝타임: 99분
- 평점: ★★★★☆ (4/5)
이런 분들께 추천합니다
- 아담 샌들러의 로맨틱한 면을 보고 싶은 분
- 드류 베리모어를 좋아하는 분
- 가볍지만 감동적인 로맨틱 코미디를 원하는 분
- 하와이의 아름다운 풍경을 즐기고 싶은 분
- 특별한 사랑 이야기에 관심 있는 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