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를 돌리다 우연히 마주한 제목 하나가 오랫동안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재즈 용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영화 이름으로 쓰인 ‘Whiplash’는 묘하게 예사롭지 않았다. 영화를 다 보고 난 뒤의 공백감은 더 선명했다. 불편한데도 계속 생각나고, 답답한데도 다시 떠올리게 되는 그런 종류의 충격이었다.

J.K. 시몬스 – 카리스마와 공포 사이의 ‘악마 스승’
J.K. 시몬스가 연기한 플레처는 처음 등장하는 순간부터 기묘한 불편함을 준다. 보통의 음악 선생님을 상상하고 앉았다면 앉은자리에서 본능적으로 자세를 고쳐 앉게 될 정도다. 그는 학생을 키우는 방식이 아니라 압박하고 밀어붙이는 방식으로 유명하다. 단순히 엄격한 스승이 아니라, 교육이라는 이름을 빌려 폭력을 정당화하는 존재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플레처 본인은 자신을 악당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점이 더 무섭다. ‘진정한 천재는 극한까지 몰아붙여야 태어난다’는 신념을 굳게 믿고 있으니까. 시몬스의 연기는 그 왜곡된 신념을 믿을 만한 얼굴로 만들어 주었다.
마일즈 텔러 – 손에서 피가 날 정도의 몰입
주인공 앤드류를 연기한 마일즈 텔러는 실제로 드럼을 오래 쳐온 배우다. 그래서인지 영화 속 연습 장면, 공연 장면, 클로즈업으로 잡히는 손과 표정이 모두 설득력을 갖는다.
피투성이가 된 손, 붕대를 감고 다시 드럼 스틱을 쥐는 모습, 박자를 쫓아가면서도 선생님의 표정을 살피는 눈빛
이 장면들에서 중요한 건 단순한 육체적 고통이 아니다. 고통을 ‘대가’로 받아들일 준비가 된 사람의 표정이다.
관객 입장에서는 쉽게 질문하게 된다. “나는 저 정도로 간절했던 적이 있었나?” “저렇게까지 나를 몰아붙인 적이 있나?”
드럼을 조금이라도 쳐본 사람이라면 영화가 보여주는 피와 땀의 디테일이 더 크게 와 닿는다.
기술적인 완성도뿐 아니라, 연습이라는 행위에 대한 집요함을 시각적으로 전달하는 작품이다.
마지막 9분 – 영화가 아니라 ‘공연’에 초대된 느낌
이 영화가 가장 널리 회자되는 이유는 마지막 공연 장면 때문이다. 약 9분 동안 이어지는 이 시퀀스는 거의 하나의 단독 공연처럼 구성되어 있는데, 관객은 그 장면을 ‘본다’기보다 음악과 함께 끌려 들어간다. 카메라는 연주자가 만들어내는 박자에 스스로 맞추는 것처럼 움직이고, 편집은 음악이라는 언어로 호흡한다. 이 장면이 끝난 뒤 많은 사람이 숨을 크게 들이쉬는 건 단순한 몰입 때문만은 아니다. 영화 전체가 묻고 있던 질문이 마지막 몇 초 동안 한꺼번에 밀려오며 관객을 벅차오르게 만들기 때문이다.
음악 – 재즈를 모르는 사람에게도 남는 리듬
대사가 거의 없는 영화이면서도, 이 작품은 음악을 통해 인간 관계의 긴장을 번역하는 데 성공했다. 재즈에 대해 아예 모르는 사람도 앤드류가 “Not quite my tempo”라는 말을 들을 때 느끼는 압박을 직관적으로 이해하게 된다. 음악이 배경이 아니라 심리의 연장선이 되고, 장르적 쾌감이 아니라 인간의 심장을 죄어오는 내밀한 장치가 된다. 사운드트랙만 따로 들으면 좋은 곡들이지만, 영화 장면이 떠오르며 마음 한쪽이 불편해지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감독 데이미언 셔젤이 이 작품을 20대 후반에 완성했다는 사실은 영화의 기세와도 잘 맞는다. 젊은 시절 그가 직접 겪었던 강압적인 음악 교육 경험이 영화의 원형이 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플레처 같은 스승을 만났던 기억, 그 안에서 솟아오르던 분노와 열망이 고스란히 작품 속에 녹아 있다. 이후 그가 ‘라라랜드’처럼 전혀 다른 분위기의 영화를 내놓았지만, 두 작품 사이에는 공통된 질문이 흐른다. 예술을 위해 감내해야 하는 고통의 범위는 어디까지일까. 열정과 강박은 어떻게 한 인간을 성장시키고 또 망가뜨릴까. ‘위플래쉬’는 그 질문을 가장 날 것의 형태로 제시한다.
폭력적인 교육, 결과만 좋으면 괜찮은가
이 영화가 가장 흥미로운 지점은 교육이란 이름 아래 벌어진 폭력이 성과를 냈을 때, 그것이 정당화되는지 여부에 대한 논쟁을 회피하지 않는 태도다. 플레처의 방식은 비인격적이고 잔인하지만, 앤드류에게 분명한 변화를 만들어낸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 변화가 온전히 앤드류를 위한 것인지, 아니면 스승이 원하는 ‘괴물 같은 연주자’를 만드는 과정이었는지는 끝까지 명확하지 않다. 영화는 절대 결론을 들려주지 않는다. 판단은 관객이 스스로 내리도록 남겨 둔다.
‘위플래쉬’는 거대한 예산이나 화려한 장치가 없어도 강렬한 영화를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다. 한정된 공간, 단순한 구성, 짧은 촬영 기간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가 남긴 울림은 거대 프랜차이즈 영화 못지않다. 특히 음악 전공자나 연주자들 사이에서 “이건 현실을 과장한 것이다”와 “거의 다큐멘터리에 가깝다”는 의견이 엇갈리는 점은 영화가 다루고 있는 주제가 얼마나 민감하고 현실적인지 드러낸다.
마무리
다시 보고 싶은 영화와 다시 보기가 두려운 영화는 종종 같은 부류에 속한다. ‘위플래쉬’가 바로 그런 작품이다. 한 번 보면 오래 남고, 시간이 지나면 다시 꺼내 보고 싶어지지만, 그 순간이 닥치면 어딘가 가슴이 답답해지는 독특한 감정이 생긴다. 마지막 공연 장면을 유튜브로 재생할 때마다 결말의 의미가 달라지는 것도 이 영화가 가진 힘이다. 앤드류가 자유로워 보이는지, 아니면 속박되어 보이는지 스스로도 확신할 수 없을 때, 이 영화는 관객 안에서 여전히 살아 있는 것이다.
편안하게 즐기고 싶은 날보다는, 마음 한쪽을 흔들어 놓을 작품을 찾을 때 ‘위플래쉬’는 뛰어난 선택이 된다. 음악을 모르더라도, 예술과 욕망 사이의 갈등에 관심이 있다면 오래 남을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