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빈민가에서 태어난다는 것
‘시티 오브 갓’은 선택에 관한 영화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선택하지 못함에 관한 영화다.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의 파벨라(빈민가)에서 태어난 아이들에게 인생은 이미 정해져 있다. 갱이 되거나, 죽거나, 아주 운이 좋으면 가난한 채로 겨우 살아남거나. 선택지는 이 세 가지뿐이다.
대학, 직장, 미래 같은 단어는 이곳에 없다.
2002년 개봉 당시 이 영화는 충격에 가까웠다. 감독 페르난두 메이렐리스는 실제 파벨라에 사는 아이들과 주민들을 대거 캐스팅했다. 연기 경험이 없는 아이들이 대부분이었지만, 오히려 그 덕분에 화면은 더 사실적으로 보인다. 여섯 살에 총을 들고, 열 살에 마약을 팔고, 열다섯 살에 사람을 죽이는 아이들. 영화 속 장면이 아니라 이들의 일상처럼 느껴진다.
영화가 던지는 질문은 단순하다.
이 아이들은 본질적으로 악한가, 아니면 환경이 악한가?
리틀 제(레안드루 피르미누)는 열한 살에 첫 살인을 저지른다. 그를 보고 단순히 “악마”라고 부를 수 있을까? 그가 자란 동네에서는 살인이 생존 수단이다. 약한 사람부터 먼저 죽고, 더 잔인한 사람만 살아남는다. 그가 스스로 그렇게 되기를 선택했다기보다, 환경이 그를 그 방향으로 몰아갔다고 보는 편이 더 가깝다.
아이들을 가르치다 보면 가끔 이 영화가 떠오른다. 우리 학생들과 ‘시티 오브 갓’ 속 아이들의 차이는 무엇일까?
지능일까? 재능일까?
대부분 아니다. 환경이다.
우리 학생들의 대부분은 서울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났다. 학원에 다니고, 대학을 준비하고, 미래를 고민한다. ‘시티 오브 갓’의 아이들은 파벨라에서 태어나 총을 배우고, 마약을 팔고, 내일 죽을지 살지부터 걱정한다.
단지 태어난 장소가 다를 뿐인데, 인생의 방향이 완전히 달라진다.
로켓 – 폭력의 바깥을 꿈꾸는 아이
부스카페(알렉상드리 호드리게스)의 별명은 ‘로켓(Rocket)’이다. 그는 시티 오브 갓에서 태어났지만, 다른 아이들과는 조금 다르다. 총을 쏘고 싶어 하지 않고, 마약 장사를 하고 싶어 하지도 않는다. 대신 카메라를 들고 싶어 한다. 사진작가가 되는 것이 그의 꿈이다.
로켓은 관찰자다. 영화 내내 내레이션을 맡으며 이 동네의 폭력을 설명하지만, 그 폭력에 직접 참여하지는 않는다. 바로 이 점이 그를 특별하게 만든다. 시티 오브 갓에서 폭력에 끌려 들어가지 않고 버티는 일은 거의 불가능하다. 어느 편에 설지 선택하라는 압박이 끊임없이 들어오고, 중립은 허용되지 않는다. 로켓은 그 사이에서 카메라 뒤에 숨듯이 서고, 렌즈 뒤에서 세상을 바라보며 버틴다. 직접 손에 피를 묻히지 않고, 관찰자의 자리를 고집한다.
로켓만 다른 길을 바라보는 이유는 영화 속에서 암시된다. 그의 형 구스(레나투 디 소우자)는 갱단에 몸담았다가 죽는다. 로켓은 형이 총에 맞아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모습을 눈앞에서 본다. 그 경험은 어린 로켓에게 깊은 상처로 남는다. 폭력이 결국 데려가는 곳이 어디인지, 그는 너무 일찍 알아버린 것이다. 그래서 같은 길을 걷지 않으려고 발버둥친다.
로켓의 여정은 결국 하나의 목표로 수렴한다.
시티 오브 갓에서 벗어나는 것.
단순히 이 동네를 떠나는 차원이 아니라, 폭력과 숙명이라는 틀 자체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그에게 카메라는 탈출 티켓이다. 총 대신 카메라를, 마약 대신 사진을 선택하면서 로켓은 생존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자신을 증명해 보이려 한다.
요즘 우리 딸아이 진로 때문에 고민이 많았다.
유난히 교육열이 높아 아직 어린아이인데도 너무 많은 학습량때문에 이게 맞는가 고민될때가 많다.
아직 초등학생인데 진로를 고민하는 일은 당연히 어렵다. 하지만 선택지가 많다는 것 자체는 분명 축복이다. 의사, 변호사, 교사, 디자이너, 엔지니어… 마음만 먹으면 여러 길을 생각해 볼 수 있다.
반면 로켓에게는 사실상 두 가지 선택지밖에 없다. 사
진작가가 되거나, 그렇지 못하면 결국 갱이 되거나. 이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해도 다행인 편이다. 대부분의 아이들은 아예 하나밖에 없는 길로 떠밀리니까.
리틀 제 – 환경이 만들어낸 폭력의 화신
리틀 제는 영화사에 길이 남을 악당이다. 그러나 그는 단순한 ‘악의 상징’이라기보다, 환경이 만들어낸 괴물에 가깝다. 그는 아주 어릴 때부터 폭력을 보고 배운다. 동네 갱들이 그의 롤모델이다. 총 쏘는 법, 마약 파는 법, 사람을 위협하고 죽이는 법. 학교 대신 그게 그의 ‘교육 과정’이다.
리틀 제는 열한 살에 처음 살인을 저지른다. 모텔 강도 사건에서다. 돈을 훔치는 것만으로는 만족하지 않고, 사람들까지 모두 죽여 버린다. 그때 그는 웃고 있다. 관객 입장에서는 소름이 끼칠 수밖에 없다.
아이 얼굴을 한 채, 아무렇지 않게 사람을 죽이는 모습.
인간성이 사라진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여기서 질문을 던지게 된다. 리틀 제는 처음부터 이런 아이였을까? 아니면 그가 자란 환경이 이렇게 만든 걸까?
리틀 제가 원하는 것은 단순하다. 존중받고 싶은 것이다. 이곳에서 존중은 사랑이 아니라 ‘두려움’의 형태로 나타난다.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것보다, 무서운 존재로 기억되는 것이 이 동네에서는 곧 권력이다. 그래서 그는 점점 더 잔혹해진다. 경쟁자를 제거하고, 배신자를 고문하고, 아이들을 거리낌 없이 죽인다.
가장 충격적인 장면 중 하나는 아이에게 총을 쥐여주고 강요하는 장면이다.
“네 친구를 쏴. 안 그러면 내가 널 쏜다.”
여섯 살짜리 아이가 울면서 친구를 향해 총을 겨눈다. 결국 방아쇠를 당긴다. 리틀 제는 그 모습을 보며 웃는다. 그 아이는 그 순간 ‘또 다른 리틀 제’가 될 씨앗을 심는다. 폭력의 고리가 다음 세대로 이어지는 것이다.
이 장면을 보고 있으면 속이 뒤집히는 느낌이 든다. 아이가 아이를 쏜다. 자유로운 선택이 아니라, 강요에 의해서. 그 아이는 평생 그 기억을 안고 살아갈 것이다. 대부분의 경우, 그 트라우마는 또 다른 폭력으로 되돌아온다. 피해자는 가해자로 자라나기 쉽다. 결국 폭력은 폭력을 낳고, 그 순환에는 끝이 보이지 않는다.
녹아웃 네드와 리틀 제 – 두 가지 리더십
영화는 서로 다른 두 갱 리더를 대조한다. 바로 녹아웃 네드(레우 모우라)와 리틀 제다.
둘 다 마약을 팔고, 조직을 거느리고, 총을 든다. 그러나 동네를 대하는 태도는 완전히 다르다.
네드는 일종의 ‘로빈 후드’에 가깝다. 불법적인 일을 하긴 하지만, 그가 얻은 이익은 어느 정도 동네 사람들에게 돌아간다. 최소한 동네 사람들에게 존중을 받으려는 마음이 있다. 사람들도 그를 좋아한다. 네드가 나타나면 아이들이 달려오고, 사람들은 그와 함께 웃고 춤춘다. 그의 폭력은 분명 잘못이지만, 그 안에 인간적인 면이 함께 보인다.
반면 리틀 제는 오로지 자신의 힘과 쾌락만 추구한다. 그는 빼앗기만 할 뿐 나누지 않는다. 동네 사람들에게 존중을 바라는 것도 아니다. 그가 원하는 것은 오직 복종이다. 사람들의 눈빛에 깃든 공포를 즐긴다. 동네 사람들은 그를 사랑하지 않고, 그저 두려워할 뿐이다.
결국 두 사람은 충돌한다. 두 갱단 사이에 전쟁이 벌어지고, 시티 오브 갓은 하루가 멀다 하고 총성이 울리는 전쟁터가 된다. 아이들이 병사가 되고, 열 살도 안 된 아이들이 길거리에서 총을 들고 서성인다. 리틀 제는 아이들을 불러 모아 말한다.
“나를 위해 싸우면 돈을 주고, 총도 주고, 사람들이 널 무서워할 거야.”
아이들은 그의 제안을 따른다. 따르지 않기에는 선택지가 없다.
네드는 결국 경찰의 총에 맞아 죽는다. 더 정확히 말하면, 경찰이 리틀 제의 편을 들어 네드를 제거해 준다. 돈을 받은 대가로. 이 동네에서 경찰은 정의의 편이 아니라, 또 다른 세력일 뿐이다.
네드의 장례식에는 수많은 사람이 모인다. 울고, 기도하고, 그를 기억한다.
“그래도 네드는 우리 편이었어.”
사람들의 애도가 진심으로 느껴진다.
반대로 리틀 제가 죽는 순간에는 아무도 애도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속으로 안도한다. 하나의 괴물이 사라졌다고.
언론과 폭력 – 로켓이 마주한 선택
로켓은 어느 순간 신문사에 취직할 기회를 얻는다. 사진을 담당하는 견습생으로. 그에게는 시티 오브 갓에서 벗어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통로다. 하지만 곧 새로운 문제가 생긴다.
리틀 제가 자신을 ‘사진 찍어달라’고 부르기 시작한 것이다.
리틀 제는 카메라 앞에 서서 포즈를 취한다. 갱단과 함께, 손에는 총을 들고. 자신을 멋있게 찍어 달라고 요구한다. 로켓은 거절하고 싶지만, 거절하면 죽을 수 있다. 결국 그는 사진을 찍는다.
그 사진은 신문 1면에 실리고, 리틀 제는 하루아침에 전국적인 악명과 동시에 일종의 ‘스타성’을 얻는다. 그는 신문을 들고 환하게 웃는다. “이제 나를 모르는 사람이 없겠구나” 하고.
하지만 로켓은 혼란스럽다.
자신이 찍은 사진이 폭력을 미화하고, 리틀 제를 더 위험한 존재로 만들어버렸기 때문이다.
신문사는 더 많은 사진을 요구한다. 자극적인 사진이 잘 팔리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파벨라의 갱 이야기를 ‘소비’한다. 먼 나라의 잔혹한 뉴스로, 흥미로운 볼거리가 사람들을 모으기 때문이다.
로켓은 딜레마에 빠진다. 계속 사진을 찍으면 커리어를 쌓을 수 있고, 시티 오브 갓에서 벗어날 수 있다.
하지만 그럴수록 폭력은 더 상품화되고, 동네는 더 위험해진다.
자기가 살고 자란 동네를 배신하는 것 같다는 죄책감이 커진다.
이 딜레마는 오늘날에도 그대로 이어진다.
언론은 어디까지 보여줘야 할까?
폭력을 드러내는 것이 정의로운 고발이 되는 순간이 있고,
그 폭력을 자극적인 구경거리로 소비하게 만드는 순간도 있다.
지금은 유튜브와 SNS까지 더해졌다. 학교 폭력 영상이 조회수를 위해 퍼지고, 가해자들이 스스로 영상을 찍어 올리기도 한다. 폭력 자체가 콘텐츠가 되는 시대다.
로켓이 카메라 들고 고민하던 문제가, 사실은 우리 모두의 문제가 된 셈이다.
경찰 – 해결책이 아니라 또 다른 문제
영화 속 경찰은 영웅이 아니다. 오히려 문제의 일부다. 많은 경찰이 리틀 제와 거래하고, 돈을 받고, 마약 거래를 눈감아 준다. 때로는 아예 갱단의 뒤를 봐주는 보호막이 되기도 한다.
물론 모든 경찰이 부패한 것은 아니다. 영화에도 정의로운 경찰이 잠깐 등장한다. 하지만 조직 전체가 썩어 있을 때, 몇몇 개인의 양심으로는 큰 변화를 만들기 어렵다. 상급자는 정치와 돈에 얽혀 있고, 동료는 이미 부패하고, 그래서 정의로운 행동이 오히려 위험해진다.
어느 장면에서 경찰이 대규모 진압 작전을 펼친다. 시티 오브 갓에 진입해 갱단을 소탕하겠다고 나선다. 총격전이 벌어지고, 아이들과 주민들이 총알 세례를 받는다. 동네는 엉망이 된다.
하지만 작전의 실제 목적은 애매하다.
정말로 갱단을 없애기 위해서였을까?
아니면 언론에 보여 줄 ‘쇼’였을까?
잠시 후 텔레비전 뉴스에는 “경찰이 마약 조직을 소탕했다”는 자막과 함께 멋있게 편집된 영상이 나온다.
그러나 며칠 지나지 않아 동네는 다시 원래 모습으로 돌아간다.
마약은 다시 팔리고, 총성은 다시 울리고, 아이들은 여전히 총을 든다.
근본적인 원인, 즉 가난과 교육의 부재, 기회의 부족은 그대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아이들 – 다음 세대로 이어지는 폭력
영화의 마지막은 어른들의 장면보다 더 무섭다. 리틀 제가 결국 아이들 손에 죽는 장면 때문이다.
그가 괴롭히고 이용하던 아이들이 모여, 복수하듯 리틀 제를 향해 총을 쏜다. 작은 몸으로 큰 총을 들고, 수십 발을 쏘아댄다. 그들은 웃기도 하고, 욕을 하기도 하고, 흥분한 상태로 그 일을 해낸다. 리틀 제는 그렇게 세상을 떠난다.
로켓은 그 장면을 사진으로 남긴다. 리틀 제의 시체 사진은 곧바로 신문 1면 후보가 된다. 동시에, 경찰의 부패를 폭로할 수 있는 사진도 로켓의 카메라 안에 있다.
이제 그는 또 하나의 선택 앞에 선다. 어떤 사진을 세상에 내보낼 것인가? 결국 로켓은 리틀 제의 시체 사진을 선택한다. 언론이 원하는 그림이고, 자신에게도 가장 안전한 선택이기 때문이다. 경찰의 부패를 폭로하는 사진을 내보냈다가, 자신이 보복을 당할 수도 있다.
이 선택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현실적인 선택이다. 하지만 그 선택으로 인해 진실의 중요한 부분은 또 한 번 묻힌다.
한편, 리틀 제를 죽인 아이들은 거리로 돌아간다. 여전히 손에는 총이 들려 있다. 그들은 이미 다음 계획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제 우리 차례야. 리틀 제가 없으니 우리가 보스다.”
누구를 먼저 처리할지, 어떻게 동네를 장악할지, 어린 목소리로 전쟁 회의를 한다.
카메라는 그들의 뒷모습을 따라가다가 점점 멀어진다. 이제 이 아이들이 새로운 리틀 제가 된다.
폭력의 순환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오히려 더 젊고 더 잔인한 세대로 이어진다. 멀리서 내려다본 시티 오브 갓은 그저 도시의 작은 점일 뿐이다. 그러나 그 작은 공간에서 매일 사람이 죽고, 아이들이 살인자로 자라고 있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사실을 모른 채, 혹은 알면서도 신경 쓰지 않은 채 살아간다.
마치며
‘시티 오브 갓’은 편하게 볼 수 있는 영화가 아니다. 통쾌한 복수도, 깔끔한 해피엔딩도 없다. 거의 내내 불편하고, 답답하고, 씁쓸하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 중요한 영화다. 애써 외면하고 싶은 현실을 억지로라도 보게 만들기 때문이다.
전 세계 곳곳에 각자의 ‘시티 오브 갓’이 있다. 브라질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미국 빈민가, 멕시코 마을, 아프리카 슬럼, 그리고 한국의 보이지 않는 그늘 속에도 비슷한 구조가 존재한다.
가난과 폭력이 대물림되고, 아이들이 태어날 때부터 선택지를 빼앗긴 채 자라는 곳들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로켓처럼 카메라를 들고 기록하는 것일까? 잘못을 세상에 보여 주는 것일까?
그것은 분명 중요한 첫걸음이다. 하지만 그 다음이 없다면, 또 다른 소비로 끝날 위험도 있다.
결국 필요한 것은 다른 선택지를 만들어 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교육, 기회, 희망. 시티 오브 갓의 아이들에게 총 대신 카메라를, 칼 대신 붓을, 마약 대신 악기를 쥐여 줄 수 있다면 어떨까. 폭력이 아닌 다른 길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걸 보여 줄 수 있다면, 폭력의 순환을 조금씩 바꿀 수 있을지도 모른다.
딸아이에게 말해 주고 싶다. 네가 많은 선택지 속에서 고민할 수 있다는 건, 이미 큰 행운을 타고난 거라고. 그 행운은 동시에 책임이기도 하다고. 선택할 자유가 없는 아이들을 잊지 말아 달라고. 가능하다면, 언젠가 그런 아이들을 위해 무언가를 해 줄 수 있는 사람이 되어 달라고.
시티 오브 갓은 직역하면 ‘신의 도시’다. 하지만 영화 속 현실은 신이 부재한 도시처럼 보인다. 그래서 오히려 질문하게 된다. 신이 이곳을 버린 것일까, 아니면 우리가 서로를 버린 것일까.
폭력의 순환은 끊을 수 있다.
매우 어렵고, 시간이 많이 걸리겠지만,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어쩌면 한 아이에게 카메라를 쥐여 주는 일, 한 아이에게 “너에게도 다른 길이 있다”고 말해 주는 일에서 그 변화는 시작될지 모른다.
로켓이 그랬던 것처럼.
영화 정보
- 제목: City of God (Cidade de Deus / 시티 오브 갓)
- 개봉: 2002년
- 감독: 페르난두 메이렐리스, 카티아 룬드
- 출연: 알렉상드리 호드리게스, 레안드루 피르미누, 페올라 지 소우자 외
- 원작: 파울루 린스 동명 소설
- 장르: 범죄, 드라마
- 러닝타임: 130분
- 평점: ★★★★★ (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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