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요일 아침, 우연히 발견한 리메이크
일요일 아침 느지막이 일어나 커피를 내리는데, TV에서 익숙한 멜로디가 흘러나왔다. 'La Vie En Rose'였다. 화면을 보니 줄리아 오몬드가 파리의 어느 다리 위에 서 있었다. 아, '사브리나'구나. 1995년작 리메이크 버전. 오드리 헵번의 1954년 원작을 봤던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두 영화 사이에는 41년이라는 시간이 있지만, 사브리나가 꿈꾸는 사랑의 본질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해리슨 포드와 그렉 키니어가 험프리 보가트와 윌리엄 홀든의 역할을 어떻게 재해석했을까. 시드니 폴락 감독은 이 고전적인 이야기를 90년대의 감성으로 어떻게 풀어냈을까. 커피 한 잔과 함께 영화 속으로 빠져들었다.
운전사의 딸이 품은 불가능한 사랑
사브리나 페어팔드(줄리아 오몬드)는 라라비 가문의 운전사 딸이다. 대저택 위의 나무에 올라가 화려한 파티를 훔쳐보며 자란 소녀는 둘째 아들 데이비드(그렉 키니어)를 사랑한다. 하지만 데이비드의 눈에 그녀는 보이지 않는 존재다. 그저 운전사의 딸, 어린 시절부터 봐온 동생 같은 아이일 뿐이다.
이 설정은 현실에서도 충분히 일어날 법한 이야기다. 우리 주변에도 닿을 수 없는 사람을 마음에 품고 사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신분의 차이는 아니더라도 마음의 거리, 관심의 온도차 같은 것들이 현대판 계급 차이가 되곤 한다.
줄리아 오몬드는 오드리 헵번과는 다른 방식으로 사브리나를 연기한다. 헵번의 사브리나가 천진난만한 소녀였다면, 오몬드의 사브리나는 좀 더 현실적이고 의지가 강한 여성이다. 파리로 떠나기 전 자살 시도(물론 미수지만)를 하는 장면도 90년대 버전에서는 더 진지하게 다뤄진다. 삶과 죽음 사이에서 그녀가 선택한 것은 변화였다.
파리, 한 여자를 바꾸는 마법의 도시
사브리나는 아버지의 권유로 파리의 요리 학교로 유학을 떠난다. 처음엔 서툴기만 하던 그녀가 점점 자신감을 찾아가는 과정이 아름답게 그려진다. 특히 수플레를 처음으로 성공시키는 장면은 단순한 요리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다. 부풀어 오르는 수플레처럼 그녀의 자존감도 함께 성장한다.
파리 장면들은 이 영화의 백미다. 에펠탑이 보이는 아파트, 센 강변의 산책, 작은 비스트로에서의 저녁 식사. 클리셰처럼 보일 수 있지만 사브리나의 변화를 보여주기에는 완벽한 배경이다. 그녀는 더 이상 나무 위에서 남의 인생을 훔쳐보는 소녀가 아니다. 자신의 인생을 살기 시작한 것이다.
흥미로운 건 원작에서는 사브리나가 요리를 배우러 가지 않는다는 점이다. 95년 버전에서 추가된 이 설정은 꽤 의미심장하다. 90년대 여성에게 필요한 것은 왕자님을 기다리는 인내심이 아니라 자립할 수 있는 기술이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것 같다.
라이너스 라라비, 일만 아는 남자의 각성
해리슨 포드가 연기한 라이너스는 험프리 보가트의 그것과는 사뭇 다르다. 보가트가 차갑지만 어딘가 여유로운 신사였다면, 포드의 라이너스는 완전히 일에만 매몰된 현대적 워커홀릭이다. 휴대폰(당시로선 최신 기기)을 손에서 놓지 않고, 집에서도 회사 일을 하며, 사랑이나 여유 따위는 사치라고 생각한다.
그런 그가 동생의 약혼자가 될 뻔한 엘리자베스(로렌 홀리)를 보호하기 위해 사브리나에게 접근한다. 처음엔 순전히 비즈니스를 위한 연기였다. 10억 달러짜리 합병 건을 지키기 위한 전략이었다. 하지만 사브리나와 시간을 보내면서 그는 서서히 변한다.
해리슨 포드의 연기가 빛나는 순간들이 있다. 사브리나와 함께 센트럴 파크를 걸으며 어색하게 웃는 장면, 처음으로 회사를 빠지고 요트를 타는 장면,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사브리나의 사진을 바라보는 장면. 인디아나 존스와 한 솔로를 연기했던 액션 히어로가 로맨틱 코미디에서도 이토록 설득력 있다는 게 놀랍다.
형제간의 미묘한 삼각관계
데이비드 역을 맡은 그렉 키니어도 인상적이다. 원작의 윌리엄 홀든이 맡았던 역할인데, 키니어는 좀 더 가볍고 경박한 느낌으로 재해석했다. 네 번 결혼했다가 세 번 이혼한 바람둥이지만 어딘가 순수한 구석이 있는 캐릭터다.
삼각관계의 묘미는 각자가 진심인 순간들이 엇갈린다는 점이다. 데이비드가 사브리나를 진지하게 바라보기 시작할 때 그녀의 마음은 이미 라이너스에게 가 있고, 라이너스가 자신의 마음을 인정할 때쯤 사브리나는 상처받아 떠나려 한다. 타이밍이 맞지 않는 이런 엇갈림이 로맨틱 코미디의 본질인지도 모른다.
90년대가 그린 현대적 신데렐라
1995년의 '사브리나'는 여러 면에서 원작보다 진보적이다. 사브리나는 단순히 예뻐져서 돌아온 것이 아니라 자신의 능력을 갖추고 돌아온다. 요리 실력뿐 아니라 자신감과 세련됨을 함께 가져온다. 라이너스를 변화시키는 것도 그녀의 외모가 아니라 삶을 대하는 태도와 철학이다.
특히 인상적인 건 사브리나가 라이너스의 거짓말을 알게 된 후의 반응이다. 원작에서는 상처받고 울기만 했다면, 95년 버전의 사브리나는 단호하게 그를 떠난다. "당신은 날 이용했어요"라고 말하며 돌아서는 그녀의 모습에서 90년대 여성상이 보인다.
비즈니스와 사랑, 그 영원한 딜레마
영화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단면을 보여준다. 라라비 가문의 10억 달러 합병 건, 일본 기업과의 협상, 주가와 이익률에 대한 집착. 이 모든 것이 사랑이라는 감정과 충돌한다. 라이너스는 평생 비즈니스만 생각하며 살았지만, 사브리나를 만나고 처음으로 질문한다. "이게 전부일까?"
회의실 장면이 특히 인상적이다. 중요한 이사회 회의 중에 라이너스는 갑자기 일어서서 나가버린다. 파리로 떠난 사브리나를 쫓아가기 위해서다. 수십억 달러의 거래를 뒤로 하고 사랑을 선택하는 순간. 현실에서는 불가능할지 모르지만, 영화는 우리가 꿈꾸는 선택을 보여준다.
파리의 다리 위에서, 그리고 새로운 시작
영화의 마지막은 파리다. 라이너스가 사브리나를 찾아 파리까지 날아온다. 폰 뇌프 다리 위에서 만난 두 사람. 처음엔 어색하지만 곧 서로의 진심을 확인한다. 'La Vie En Rose'가 다시 흘러나오는 가운데, 두 사람은 새로운 시작을 약속한다.
시드니 폴락 감독은 원작의 로맨스에 90년대의 현실성을 더했다. 사랑은 여전히 아름답지만, 그것을 얻기 위해서는 각자의 성장과 변화가 필요하다는 것. 사브리나는 파리에서 자신을 찾았고, 라이너스는 사브리나를 통해 삶의 의미를 발견했다. 두 사람이 함께하는 것은 필연이 아니라 선택이었다.
줄리아 오몬드, 그녀만의 사브리나
줄리아 오몬드는 오드리 헵번과 비교되는 부담을 안고 이 역할을 맡았다. 하지만 그녀는 헵번을 흉내 내는 대신 자신만의 사브리나를 만들어냈다. 좀 더 성숙하고, 독립적이며, 자기 목소리를 가진 사브리나. 90년대 관객들이 공감할 수 있는 현대적 여성상이었다.
특히 프랑스어를 하는 장면들이 매력적이다. 서툴던 발음이 점점 유창해지는 과정이 그녀의 성장을 은유한다. 파리에서 돌아온 사브리나가 라라비 가족 파티에서 프랑스 대사와 자연스럽게 대화하는 장면은 그녀가 얼마나 변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시대를 넘어서는 이야기의 힘
원작이 나온 1954년과 리메이크가 나온 1995년, 그리고 지금 2024년. 70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지만 사브리나의 이야기는 여전히 우리에게 말을 건넨다. 계급의 벽은 형태를 바꿨을 뿐 여전히 존재하고, 진정한 사랑을 찾는 여정은 여전히 험난하다.
하지만 영화는 희망을 말한다. 변화는 가능하고, 사랑은 사람을 성장시키며, 때로는 불가능해 보이는 일도 일어난다고. 일요일 아침에 우연히 만난 이 영화가 준 작은 위로다.
영화 정보
- 제목: Sabrina (사브리나)
- 개봉: 1995년
- 감독: 시드니 폴락
- 출연: 해리슨 포드, 줄리아 오몬드, 그렉 키니어
- 원작: 1954년 빌리 와일더 감독 작품
- 러닝타임: 127분
평점: ★★★★☆ (4/5)
원작의 무게에 눌리지 않고 자신만의 색깔을 찾은 성공적인 리메이크. 90년대의 감성으로 재해석한 현대적 신데렐라 이야기.
추천하고 싶은 분들:
- 클래식 로맨스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작품을 좋아하는 분들
- 해리슨 포드의 색다른 모습을 보고 싶은 분들
- 파리의 아름다운 풍경을 즐기고 싶은 분들
- 자기 성장과 사랑이 균형 잡힌 이야기를 원하는 분들
함께 보면 좋은 영화들:
- 사브리나 (1954) - 오드리 헵번의 원작
- 프렌치 키스 (1995) - 파리를 배경으로 한 또 다른 로맨스
- 유브 갓 메일 (1998) - 현대적 비즈니스 로맨스
- 워킹 걸 (1988) - 계급을 넘어서는 여성의 성장 스토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