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99년, 영화관을 나오며 느낀 충격
‘매트릭스’를 처음 본 건 1999년 봄이었다. 그때 나는 대학생이었고, 어딜 가나 “대작이 나왔다”는 소문이 무성했다. 친구들과 극장에 가서 영화를 보고, 불이 켜지고 밖으로 나오는 순간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거리를 걷는 사람들, 지나가는 자동차들, 눈앞에 보이는 모든 것들이 왠지 진짜가 아닌 것 같았다. 혹시 나도 매트릭스 안에서 살아가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무렵 사람들 사이에서는 “리얼 월드”라는 말을 하며 매트릭스의 세계관을 농담처럼 섞어 이야기하는 것이 하나의 유행이기도 했다.
워쇼스키 남매(당시에는 형제로 알려져 있었다)가 만든 이 영화는 SF 영화의 역사를 바꿔놓았다. 총알이 느리게 날아가는 장면, 주인공이 공중에 멈춰 서서 몸을 젖히는 장면 같은 것들은 그때까지 본 적 없는 화면이었다. ‘불릿 타임’이라는 기법이었는데, 이후 수많은 영화와 광고에서 따라 하게 된다.
지금 돌이켜 보면 20년도 훌쩍 지난 영화인데도 여전히 촌스럽지 않고 신선하게 느껴진다. 화려한 특수효과도 대단했지만, 그보다 더 강하게 다가왔던 건 이야기 자체였다. 진짜와 가짜, 현실과 가상, 자유와 통제에 대한 질문을 집요하게 던졌다. 나 역시 영화를 보면서 그 메시지에 큰 충격을 받았다.
평범한 프로그래머 토마스 앤더슨
주인공 네오는 낮에는 평범한 회사원이다. 메타코텍스라는 소프트웨어 회사에서 프로그래머로 일하는 본명 토마스 앤더슨으로 나왔는데 키아누 리브스가 연기했다. 배역으로서 극 안에서 그의 담담하고 무표정한 얼굴은 왠지 전형적인 프로그래머 이미지와 잘 어울렸다.
하지만 밤이 되면 그는 해커가 된다. ‘네오’라는 이름으로 불법 소프트웨어를 거래하고, 해커들 사이에서는 꽤 이름이 알려진 실력자다.
그러던 어느 날부터 네오는 알 수 없는 불안과 함께 이상한 꿈을 반복해서 꾼다. 뭔가를 찾아야 할 것 같은데, 정작 무엇을 찾아야 하는지 알 수 없다. 컴퓨터 화면에는 이해할 수 없는 메시지들이 떠오른다.
“매트릭스가 널 지켜보고 있다.”
“흰 토끼를 따라가라.”
어느 밤, 소프트웨어를 사러 손님들이 집에 찾아오는데 그중 한 여자의 어깨에 흰 토끼 문신이 있다. 네오는 화면 속 메시지를 떠올리고 결국 그들을 따라 클럽으로 향한다.
트리니티와의 만남
클럽에서 한 여자가 네오에게 다가온다. 검은 옷에 짧은 머리, 날카로운 눈빛. 바로 트리니티다. 캐리 앤 모스가 연기한 트리니티는 등장만으로도 압도적인 카리스마를 보여준다.
트리니티는 해커들 사이에서는 이미 전설적인 존재다. 국세청 컴퓨터를 해킹했다는 소문까지 돌 정도다. 네오는 트리니티가 남자일 거라고 짐작하고 있었지만, 실제로 마주한 트리니티는 여자였다. 트리니티는 네오에게 조용히 말한다.
“모피어스가 당신을 찾고 있어요. 그가 당신에게 답을 줄 수 있을 거예요. 당신이 평생 찾아온 그 질문의 답을요.”
다음 날, 회사로 배송된 작은 택배 상자를 네오가 열어보니 그 안에는 핸드폰이 들어 있다. 그리고 곧바로 전화벨이 울린다.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목소리.
“안녕하세요, 네오. 드디어 당신을 만나는군요.”
모피어스다.
모피어스는 요원들이 곧 네오를 잡으러 올 거라 경고하며, 지금 당장 도망쳐야 한다고 말한다. 창문 밖 비계를 타고 옥상으로 올라가라고 안내하지만, 네오는 결국 두려움에 사로잡혀 그대로 요원들에게 붙잡힌다.
요원 스미스의 등장
네오는 심문실로 끌려간다. 선글라스와 검은 양복 차림의 요원 셋이 들어오고, 그중 리더가 스미스다. 휴고 위빙이 연기한 스미스는 기계처럼 건조한 말투와 표정으로 묘한 공포감을 안겨준다.
스미스는 네오의 파일을 내밀며 지금까지의 해킹 기록을 낱낱이 들춰낸다. 이대로 가면 감옥에 갈 수밖에 없다고 압박하면서, 동시에 거래를 제안한다. 모피어스를 넘기면 모든 죄를 없던 일로 해주겠다는 것이다.
네오는 제안을 거절한다. 그 순간 스미스는 상식 밖의 행동을 한다. 네오의 입이 사라지고, 배에 기계 벌레 같은 것을 집어넣는다. 네오는 비명을 지르며 깨어난다. 꿈이었나 싶지만, 곧 그렇지 않다는 걸 알게 된다.
트리니티가 네오를 데리러 와 차에 태우고, 모피어스에게로 가는 길에 네오의 배꼽에서 그 기계 벌레를 꺼내 버린다. 단순한 악몽이 아니라 실제로 매트릭스 안에서 일어난 일이고, 그것이 추적 장치였다는 사실이 드러나는 장면이다.
빨간 알약과 파란 알약
허름한 건물 안, 네오는 마침내 모피어스와 마주한다. 로렌스 피시번이 연기한 모피어스는 마치 오래된 스승 같은 분위기를 풍긴다. 그는 네오를 오래전부터 기다려 왔다고 말한다.
“매트릭스가 뭔지 알고 싶습니까?”
모피어스의 질문에 네오가 고개를 끄덕이자, 모피어스는 파란색과 빨간색 두 개의 알약을 꺼내 보인다.
“파란 알약을 먹으면 모든 건 잊고 예전처럼 평범한 삶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빨간 알약을 먹으면 토끼굴이 얼마나 깊은지 보여드리죠. 선택은 전적으로 당신 몫입니다.”
네오는 잠시 망설이다 빨간 알약을 집어 들어 삼킨다. 곧 이상한 일이 일어난다. 거울이 액체처럼 흐르며 몸을 뒤덮고, 주변이 일그러지고, 네오의 몸이 부서져 내려가는 듯한 감각에 빠져든다.
진짜 세계
다음 순간, 네오는 완전히 다른 공간에서 눈을 뜬다. 온몸에 튜브가 연결되어 있고 끈적한 액체 속에 떠 있다. 주변을 둘러보니 끝없이 이어진 캡슐 속에 수많은 사람들이 같은 모습으로 들어 있다.
거대한 기계 장치가 네오의 몸을 스캔하고, 연결된 튜브들을 하나씩 뽑아낸 후 그를 아래로 떨어뜨린다. 하수구 같은 통로를 통해 흘러 내려간 네오는 작은 우주선에 의해 구조된다.
그 우주선이 바로 모피어스의 배, 네부카드네자르호다. 승무원들이 네오를 치료하고, 네오는 처음으로 진짜 세계의 공기와 중력을 경험한다. 평생 사용하지 않았던 근육은 퇴화해 있고, 눈도 처음으로 진짜 빛을 본다. 재활이 필요한 상태다.
시간이 조금 흐른 뒤, 네오가 어느 정도 회복되자 모피어스는 진실을 들려준다. 지금은 2199년 무렵이며, 우리가 알고 있던 1999년은 매트릭스 속 가상현실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네오도 충격을 받았고 영화를 보는 나도 뒤통수를 맞은거 같았다.
인간과 기계의 전쟁
모피어스는 인간과 기계의 전쟁 역사를 들려준다. 21세기 초반 인간은 인공지능을 만들어 처음에는 인간을 돕는 도구로 사용했다. 하지만 기계는 점점 더 똑똑해졌고, 결국 인간과 대립하게 된다.
인간과 기계의 전쟁이 벌어지고, 인간은 기계의 에너지 원인 태양을 차단하기 위해 하늘을 검은 구름으로 덮어버린다. 그러자 기계들은 새로운 에너지원으로 인간의 생체 에너지를 선택한다.
기계들은 캡슐 안에서 인간을 ‘배양’하고, 그들의 몸에서 나오는 에너지를 전기로 변환해 사용한다. 인간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캡슐 속에서만 존재하는 셈이고, 정신은 매트릭스에 연결되어 1999년의 가상 현실을 진짜 인생이라고 믿는다. 그렇게 인간은 기계의 ‘배터리’가 된다.
시온, 마지막 인간 도시
하지만 모두가 영원히 속아 넘어간 것은 아니다. 일부 인간들은 깨어나 캡슐에서 탈출했고, 지하 깊숙한 곳에 마지막 인간 도시 ‘시온’을 세운다.
시온의 사람들은 다시 매트릭스에 접속해 다른 인간들을 깨우는 일을 한다. 모피어스와 그의 동료들은 네부카드네자르호를 타고 다니며 해방시킬 사람들을 찾는 역할을 맡는다.
모피어스는 네오가 특별한 이유를 설명한다. 오래전부터 ‘구세주’가 나타날 것이라는 예언이 있었고, 그가 매트릭스를 무너뜨리고 전쟁을 끝낼 것이라는 믿음이 전해져 내려온다. 모피어스는 네오가 바로 그 구세주라고 확신하고 있다.
하지만 네오는 도저히 믿기 어렵다.
“저는 그냥 평범한 사람일 뿐이에요.”
모피어스는 미소를 지으며 말한다.
“트리니티도 처음엔 그랬습니다. 곧 알게 될 겁니다.”
매트릭스 훈련
네오는 매트릭스 훈련 프로그램에 접속해 가상공간에서 각종 능력을 익힌다. 텅 빈 하얀 공간에서 시작해, 다양한 시뮬레이션이 로딩된다. 매트릭스 안에서는 물리 법칙에 완전히 구속되지 않고, 정신력으로 한계를 넘을 수 있다는 것이 모피어스의 설명이다.
모피어스는 빌딩에서 빌딩으로 뛰어넘고, 상식을 벗어난 점프를 선보인다. 네오는 그대로 따라 해 보지만 바로 바닥으로 곤두박질친다. 이어지는 무술 훈련에서는 쿵푸 프로그램을 다운받는 것만으로 순식간에 무술을 익히고, 모피어스와 실제로 대련을 펼친다. 처음에는 전혀 상대가 되지 않지만 점점 빨라지고 강해지는 네오의 움직임은 보는 재미가 있다.
모피어스는 “빨라지고 있군요”라고 말하며 웃는다. 네오와 모피어스가 대련하는 장면은 지금 봐도 액션의 교과서 같은 느낌이다. 공중을 오가며 싸우는 모습과 리듬감 있는 편집은 이후 수많은 작품에 영향을 줬다.
오라클을 만나러
어느 정도 훈련이 끝난 뒤, 모피어스는 네오를 오라클에게 데려간다. 오라클은 예언자 역할을 하는 인물로, 그가 네오가 구세주인지 아닌지를 확인해 줄 수 있다고 한다.
오라클의 집은 의외로 평범한 아파트다. 안에는 다른 후보로 보이는 아이들이 모여 초능력 연습을 하고 있다. 그중 한 아이는 숟가락을 정신력만으로 구부리는 모습을 보여준다.
오라클은 부엌에서 쿠키를 굽고 있는 중년 여성으로 등장한다. 글로리아 포스터가 연기한 오라클은 친근한 이웃집 할머니 같은 분위기를 풍긴다. 네오에게 쿠키를 건네며 이런저런 질문을 던진 후, 조용히 말한다.
“미안하지만, 당신은 구세주가 아니에요.”
네오는 당황한다. 오라클은 말을 이어간다.
“당신은 아직 뭔가를 기다리고 있어요. 다음 생일 수도 있고, 다른 무언가일 수도 있죠.”
그리고 중요한 경고를 남긴다.
“모피어스는 당신을 너무 믿고 있어요. 곧 선택의 순간이 올 겁니다. 당신의 목숨과 모피어스의 목숨,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할 거예요.”
사이퍼의 배신
모피어스의 동료 가운데 사이퍼라는 인물이 있다. 조 판톨리아노가 연기한 사이퍼는 처음부터 어딘가 불편한 분위기를 풍긴다. 그는 매트릭스 안에서 몰래 스미스 요원을 만나 거래를 한다. 모피어스를 넘기는 대가로 자신을 다시 매트릭스 안으로 돌려보내 달라는 것이다. 진짜 세계의 삶이 너무 고되고 비참했기 때문이다.
“무지가 축복이라는 말이 맞아. 아무것도 모르는 게 더 행복해.”
사이퍼의 배신으로 결국 모피어스는 붙잡히고, 요원들은 그의 뇌에서 시온의 접근 코드를 빼내려 한다. 만약 성공하면 시온은 공격을 받고 인류의 마지막 도시가 사라질 수 있다.
네오는 모피어스를 구하겠다고 결심하고, 트리니티가 동행한다. 둘이 건물에 침입해 싸우는 장면은 이 영화에서 가장 유명한 전투 장면이다. 무기를 가득 장착하고 로비를 휩쓸어버리는 그 장면은 당시 액션 영화의 기준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트리니티와 네오가 로비에 들어서자 경비원들이 총을 겨눈다. 네오가 코트를 펼치자 안에서 수많은 총이 드러난다. 곧바로 총격전이 시작된다. 슬로모션으로 총알이 날아가고, 네오는 공중제비를 돌며 기둥 뒤로 몸을 숨긴다. 트리니티는 벽을 타고 뛰어오른다. 이 장면은 거의 ‘완벽하게 안무된 무용’에 가까운 액션이다.
나는 과학을 가르치고 있는데, 학생들이 이 장면의 물리적 타당성을 물어본다면 이렇게 말하고 싶다.
“그냥 매트릭스 안에서는 물리 법칙이 다르다고 생각하면 된다. 매트릭스는 진짜 세계가 아니니까.”
네오와 트리니티는 결국 모피어스를 구출하고 헬기를 타고 탈출한다. 그러나 스미스 요원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네오는 다시 돌아가 그와 일대일로 맞선다.
지하철역 결투
지하철역에서 벌어지는 네오와 스미스의 결투 장면은 이 영화의 또 다른 백미다. 두 사람은 믿기 힘든 속도로 주먹과 발차기를 주고받고, 바닥과 기둥이 부서져나간다.
하지만 네오는 점점 밀린다. 아직 완전히 ‘깨어난’ 상태가 아니기 때문이다. 스미스는 네오를 선로 위로 밀어버리고, 기차가 다가오는 순간 가까스로 네오는 그를 밀쳐내고 몸을 피한다.
이후 네오는 전화선을 통해 빠져나가야 한다. 매트릭스에서의 전화는 진짜 세계로 돌아가는 출구다. 트리니티와 모피어스는 먼저 탈출하지만, 네오가 탈출하기 직전 스미스가 다시 나타난다. 총성이 울리고, 네오의 몸에 총알이 박힌다.
진짜 세계에서 네오의 심장이 멈추고, 모니터엔 경고음이 울린다. 모두가 절망하는 순간, 트리니티가 네오에게 다가가 조용히 고백한다.
“오라클이 말했어요. 내가 사랑하게 될 남자가 구세주라고. 그래서 알아요. 당신이 죽을 리 없다는 걸. 당신은 구세주예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니까.”
트리니티의 키스와 함께 네오의 심장이 다시 뛰기 시작한다. 매트릭스 안에서 네오가 눈을 뜨고 일어선다.
스미스가 다시 총을 쏘지만, 이번엔 네오가 손을 들어 총알을 멈춰 세운다. 공중에서 멈춘 총알들이 바닥으로 떨어진다. 그제야 네오는 완전히 깨닫는다. 이 모든 것은 프로그램일 뿐이며, 자신은 그 규칙을 바꿀 수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초록색 코드로 보이는 매트릭스의 세계는 더 이상 그를 속일 수 없다. 스미스도 단지 하나의 ‘코드’에 불과하다. 네오는 스미스에게 뛰어들어가 그의 몸 안으로 파고들고, 스미스는 폭발하며 사라진다.
전화 한 통
영화의 마지막, 네오는 매트릭스 안에서 누군가에게 전화를 건다. 일종의 ‘선전포고’ 같은 통화다. 그는 시스템에게 이렇게 말한다.
“나는 당신들이 두려워하는 그 미래를 보여주러 왔습니다. 사람들에게 당신들이 숨기고 싶어 하는 세상을 보여주려고요. 규칙도 통제도 없는 세상. 모든 것이 가능한 세상.”
그리고 전화를 끊은 뒤 하늘로 날아오른다. 슈퍼맨처럼. 화면이 어두워지고, 엔딩 크레딧과 함께 레이지 어게인스트 더 머신의 ‘Wake Up’이 흘러나온다.
철학적 질문들
‘매트릭스’는 단순한 SF 액션 영화가 아니다. 끊임없이 철학적인 질문을 던지는 영화다.
진짜와 가짜를 우리는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
모든 것이 시뮬레이션이라면, 우리의 삶과 감정은 어떤 의미를 갖는가?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가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동굴 안에 갇힌 사람들은 벽에 비친 그림자만을 보며 산다. 그림자가 세상의 전부라고 믿는다. 어느 날 한 사람이 동굴 밖으로 나가 진짜 세상을 보지만, 동굴로 돌아와 그 이야기를 들려줘도 아무도 믿지 않는다.
네오는 바로 그 동굴에서 밖으로 나온 사람과 같다. 매트릭스가 가짜라는 사실을 깨달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전히 매트릭스 안에서 만족하며 살고 있다. 진실을 알기보다 편안한 거짓을 선택하는 것이다.
데카르트의 회의론도 떠오른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모든 것을 의심하더라도 의심하고 있는 ‘나’만은 부정할 수 없다는 주장. 네오 역시 끝내 자신의 선택으로 빨간 알약을 삼키며, 스스로의 존재와 진실을 확인하는 길을 택한다.
혁신적인 액션
‘매트릭스’의 액션은 영화사에 남을 만큼 혁신적이었다. 대표적인 것이 ‘불릿 타임’이다. 수십 대의 카메라를 원형으로 배치해 동시에 촬영함으로써, 시간은 멈춘 듯 느리게 흐르면서도 카메라는 자유롭게 움직이는 효과를 만들었다.
옥상 위에서 네오가 총알을 피하는 장면이 그 정점이다. 네오가 몸을 뒤로 젖히며 피할 때, 총알은 느리게 날아가고 카메라는 그 주변을 빙글 돌며 잡는다. 처음 그 장면을 봤을 때 정말 소름이 돋았다. 이전까지의 영화에서는 볼 수 없었던 완전히 새로운 화면이었다.
홍콩 무술 영화의 영향도 크게 느껴진다. 와이어 액션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배우들이 공중에 떠서 싸우는 장면을 구현했고, 원화평이 무술 감독으로 참여하면서 동양적인 리듬과 동작들이 잘 살아났다.
키아누 리브스를 비롯한 주연 배우들은 촬영 전 몇 달 동안 강도 높은 무술 훈련을 받았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CG보다는 실제 배우들의 움직임에서 오는 생동감이 크고, CG는 필요한 부분에 균형 있게 사용된 느낌이다.
시리즈의 시작
‘매트릭스’는 이후 3부작의 시작점이 된다. ‘매트릭스 리로디드’와 ‘매트릭스 레볼루션’(둘 다 2003년 개봉)에 이어, 2021년에는 ‘매트릭스 리저렉션’까지 나왔다.
개인적으로는 속편들이 첫 편만큼의 충격을 주지는 못했다. 세계관과 철학적 설정이 점점 복잡해지면서, 오히려 감정적인 힘은 조금 약해졌다고 느꼈다. 액션은 더 화려해졌지만, 처음 극장에서 ‘매트릭스’를 봤을 때의 그 신선함과 어지러움은 다시 느끼기 어려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첫 번째 ‘매트릭스’는 지금 봐도 여전히 명작이다. 1999년 영화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만큼 촬영, 편집, 연출이 세련돼 있고, 오히려 지금 시대에 더 와닿는 주제를 담고 있다. 가상현실, 인공지능, 시뮬레이션 이론 등 당시에는 먼 미래처럼 느껴졌던 것들이 이제는 현실의 문제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마치며
언젠가 우리 딸이 좀 더 크면 꼭 함께 보고 싶은 영화다. 아직은 너무 어릴 것 같고, 총격 장면도 많고 내용도 복잡해서 당분간은 미뤄야 할 것 같다. 중학생쯤 되면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그때 아마 이런 질문을 들을지도 모른다.
“아빠, 우리도 매트릭스 안에 살고 있는 거 아니에요?”
그러면 나는 이렇게 대답할 것 같다.
“어쩌면 그럴 수도 있지. 그래도 중요한 건, 진짜든 가짜든 결국 우리가 어떻게 살지 스스로 선택할 수 있다는 거야.”
‘매트릭스’는 결국 선택에 관한 영화다. 빨간 알약과 파란 알약, 불편한 진실과 편안한 거짓, 자유와 안전. 우리는 매일 크고 작은 선택의 기로에 선다.
1999년 그 봄, 극장 문을 나서며 느꼈던 그 어지러운 감각이 아직도 선명하다. 세상이 조금 다르게 보였다. 어쩌면 그게 ‘매트릭스’의 진짜 힘인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당연하다고 믿던 것들을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힘. 그 질문을 던지는 힘이 이 영화 속에 있었다.
당신이라면 어떤 알약을 선택하겠는가.
빨간 알약인가, 파란 알약인가.
영화 정보
- 제목: The Matrix (매트릭스)
- 개봉: 1999년
- 감독: 워쇼스키 남매(래리, 앤디 워쇼스키)
- 출연: 키아누 리브스, 로렌스 피시번, 캐리 앤 모스, 휴고 위빙
- 장르: SF, 액션
- 러닝타임: 136분
- 평점: ★★★★★ (5/5)
이런 분들께 추천합니다
- 철학적인 SF 영화를 좋아하는 분
- 혁신적인 액션 장면을 보고 싶은 분
- 90년대 명작을 다시 보고 싶은 분
- 가상현실과 인공지능에 관심 있는 분
- 영화 역사에 남을 작품을 경험하고 싶은 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