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월이 되면 찾게 되는 영화
11월 마지막 주를 보내고 있다. 곧 12월이겠지. 사무실에 크리스마스 장식과 겨울용 간식이 준비되어있더라. 거리에 크리스마스 트리가 하나둘 세워지고, 상점마다 캐럴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이맘때가 되면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영화가 있다. '러브 액츄얼리(Love Actually, 2003)'. 이 영화는 이제 크리스마스 영화의 대명사가 됐다.
처음 이 영화를 봤을 때가 2003년 겨울이었으니, 벌써 20년이 넘었다. 당시에는 그저 여러 커플의 사랑 이야기를 담은 가벼운 로맨틱 코미디로만 봤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고 다시 볼 때마다 다른 이야기가 눈에 들어온다. 20대에는 콜린의 엉뚱한 미국 여행이 재밌었고, 30대에는 줄리엣과 마크의 짝사랑이 애틋했고, 40대가 된 지금은 해리와 카렌의 부부 이야기가 가슴을 친다.
이 영화의 천재성은 바로 여기에 있다. 단순히 사랑 이야기를 나열한 게 아니라, 사랑의 모든 형태를 보여준다. 첫사랑의 설렘, 부부간의 신뢰, 짝사랑의 아픔, 가족애, 우정. 그리고 그 모든 것이 크리스마스라는 계절 속에서 교차한다.
리처드 커티스의 마법, 10개의 이야기를 하나로
'러브 액츄얼리'의 각본과 감독을 맡은 리처드 커티스는 이전에 '노팅힐'과 '네 번의 결혼식과 한 번의 장례식'의 시나리오를 썼던 작가다. 그는 영국식 유머와 따뜻한 감성을 완벽하게 결합할 줄 아는 사람이다.
이 영화에서 그가 선보인 구조는 대담하다. 10개가 넘는 이야기가 동시에 진행된다. 영국 총리, 작가, 그래픽 디자이너, 배우, 학생, 심지어 대역배우까지. 각자의 사랑 이야기가 런던 곳곳에서 펼쳐진다.
놀라운 건 이 모든 이야기가 산만하지 않다는 것이다. 각각의 이야기는 독립적이지만, 동시에 서로 연결돼 있다. 직접적인 연결도 있고, 간접적인 연결도 있다. 결혼식 장면에서 여러 캐릭터가 한 공간에 모이고, 공항 장면에서 다시 교차한다. 마치 실제 세상처럼, 우리 모두가 보이지 않는 선으로 연결돼 있다는 걸 보여준다.
리처드 커티스는 영화 시작 부분에서 히드로 공항 도착 로비 장면을 보여주며 이렇게 말한다. "사랑은 실제로 존재합니다(Love actually is all around)." 테러, 전쟁, 증오가 뉴스를 가득 채우지만, 공항에서 사랑하는 사람을 맞이하는 순간의 표정을 보면 사랑이 진짜임을 알 수 있다고. 이 오프닝은 영화 전체의 톤을 설정한다.
총리와 나탈리, 신분을 초월한 사랑
휴 그랜트가 연기한 영국 총리 데이비드와 마르틴 맥커천이 연기한 다우닝가 10번지 직원 나탈리의 이야기는 가장 밝고 유쾌하다. 휴 그랜트 특유의 어색함과 영국식 유머가 총리라는 권위 있는 직책과 만나 코믹한 효과를 낸다.
총리가 된 첫날, 다우닝가를 돌아다니며 직원들을 만나는 장면부터 미소가 지어진다. 그리고 나탈리를 처음 만났을 때의 표정. "오, 젠장(Oh, fuck)"이라고 속으로 외치며 한눈에 반하는 모습. 권력자도 결국 사랑 앞에서는 평범한 한 사람일 뿐이다.
미국 대통령(빌리 밥 손턴)이 나탈리에게 추근대는 장면을 목격한 후, 기자회견에서 미국에 맞서는 장면은 이 영화의 명장면 중 하나다. "우리는 작은 나라지만, 위대한 나라입니다"라고 선언하는 모습. 정치적 메시지를 담으면서도 로맨틱하다.
크리스마스 이브, 학교 연극 공연장에서 나탈리를 찾기 위해 집집마다 돌아다니는 장면도 좋다. 총리 경호원들이 따라다니는 가운데, 평범한 동네에서 한 집 한 집 문을 두드린다. 권력도, 체면도 내려놓고 오직 사랑하는 사람을 찾기 위해. 이 장면이 코믹하면서도 감동적인 이유다.
제이미와 오렐리아, 언어를 넘어선 사랑
콜린 퍼스가 연기한 작가 제이미와 루시아 모니즈가 연기한 포르투갈 가정부 오렐리아의 이야기는 조용하지만 아름답다. 여자친구의 배신으로 상처받은 제이미는 프랑스 시골 별장으로 도피한다. 그곳에서 만난 오렐리아. 둘은 언어가 통하지 않는다. 제이미는 영어를, 오렐리아는 포르투갈어를 쓴다.
하지만 언어가 통하지 않아도 마음은 통한다. 함께 일하며, 차를 마시며, 미소를 나누며 서로에게 끌린다. 제이미가 호수에 떨어진 원고를 건지려 할 때, 오렐리아도 뛰어든다. 말없이 함께 물속에서 젖은 종이를 모으는 장면. 어떤 고백보다 강렬한 순간이다.
제이미가 크리스마스에 포르투갈로 날아가 오렐리아에게 서툰 포르투갈어로 청혼하는 장면은 영화 전체에서 가장 낭만적인 순간 중 하나다. "아름다운 오렐리아, 저와 결혼해주시겠습니까?" 문법도 엉망이고 발음도 어색하지만, 그 진심은 완벽하게 전달된다. 식당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영어로 통역해주고, 오렐리아는 영어로 "예"라고 대답한다. 서로를 위해 상대의 언어를 배운 것이다.
마크와 줄리엣, 가장 애틋한 짝사랑
앤드류 링컨이 연기한 마크와 키이라 나이틀리가 연기한 줄리엣의 이야기는 이 영화에서 가장 가슴 아픈 부분이다. 마크는 절친 피터의 아내 줄리엣을 사랑한다. 이룰 수 없는 사랑이고, 말해서도 안 되는 사랑이다.
줄리엣은 처음에 마크가 자신을 싫어한다고 생각한다. 결혼식 비디오를 보고 나서야 진실을 알게 된다. 비디오에는 온통 줄리엣의 얼굴만 클로즈업돼 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오직 그녀만.
크리스마스 이브, 마크는 줄리엣의 집 앞에서 캐럴을 부르는 사람들 사이에 섞여 초인종을 누른다. 그리고 준비한 팻말들을 하나씩 보여준다. "말해보세요, 크리스마스 이브에 그 누가 당신의 문 앞에 서 있는 사람을 거절할 수 있을까요?" 그리고 이어지는 고백. "당신은 완벽합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감정을 고백하면서도 동시에 포기한다. "제 소원이자 저주입니다. 메리 크리스마스." 줄리엣이 뛰쳐나와 그에게 키스하고, 마크는 미소 지으며 돌아간다. "충분해(Enough now)."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인정하고 내려놓는 순간. 어떤 면에서 가장 성숙한 사랑의 형태다.
해리와 카렌, 흔들리는 결혼 생활
앨런 릭먼이 연기한 해리와 엠마 톰슨이 연기한 카렌의 이야기는 이 영화에서 가장 현실적이고 무겁다. 오랜 세월 함께한 부부. 아이들도 있고, 서로를 아끼지만, 어느 순간 균열이 생긴다.
해리는 새로 들어온 섹시한 비서 미아에게 흔들린다. 실제로 바람을 피우지는 않지만, 마음이 흔들린다. 크리스마스 선물로 미아에게 목걸이를 사고, 아내에게는 조니 미첼 CD를 준다.
카렌이 선물 포장을 발견하고, 크리스마스 날 자신이 받은 선물이 그 목걸이가 아니라는 걸 알았을 때의 표정. 엠마 톰슨의 연기가 압권이다. 침실로 들어가 조니 미첼의 'Both Sides Now'를 들으며 조용히 울부짖는 장면. 대사 하나 없이 표정과 눈물만으로 모든 걸 말한다.
학교 크리스마스 공연에서 딸이 연기하는 모습을 보며 억지로 미소 짓는 카렌. 하지만 해리를 바라보는 눈빛에는 실망과 상처가 가득하다. "우리가 괜찮을 것 같아?"라고 묻는 그녀에게 해리는 확답하지 못한다.
이 이야기는 해피엔딩이 아니다. 명확한 화해도, 용서도 보여주지 않는다. 단지 그들이 계속 함께 있다는 것만 보여줄 뿐이다. 사랑이 항상 완벽하지 않다는 것, 때로는 상처와 실망 속에서도 관계를 이어가야 한다는 현실을 담담하게 그린다.
대니얼과 샘, 아버지와 아들
리암 니슨이 연기한 대니얼과 토마스 생스터가 연기한 의붓아들 샘의 이야기는 가족애를 다룬다. 아내이자 샘의 엄마인 조안나를 잃은 대니얼. 그는 슬픔 속에서도 샘을 돌봐야 한다.
샘도 학교 동창 조안나(다른 조안나)를 짝사랑한다. 엄마를 잃은 슬픔과 첫사랑의 설렘이 공존하는 나이. 대니얼은 샘의 고민을 진지하게 들어주고, 함께 작전을 짠다. 드럼을 배워서 크리스마스 공연에서 조안나의 관심을 끌기로.
크리스마스 공연에서 샘이 드럼을 연주하고, 조안나가 'All I Want For Christmas Is You'를 부르는 장면은 영화 전체의 하이라이트다. 여러 이야기가 한 공간에서 교차하고, 샘은 용기를 내어 조안나에게 다가간다.
공항에서 출국하는 조안나를 쫓아가는 샘. 보안 검색대를 통과하지 못하지만, 조안나가 돌아와 키스한다. 대니얼이 지켜보며 미소 짓는 장면. 아들이 성장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아버지의 뿌듯함과 쓸쓸함이 공존한다.
콜린과 미국, 가장 유쾌한 에피소드
크리스 마샬이 연기한 콜린의 이야기는 영화에서 가장 가볍고 유쾌하다. 영국에서는 전혀 인기 없는 콜린은 미국에 가면 영국 억양 때문에 여자들에게 인기가 있을 거라고 확신한다. 그리고 정말로 위스콘신으로 날아간다.
이 에피소드는 현실성이 떨어지고, 다소 판타지 같다. 하지만 그게 포인트다. 영화 전체가 무거워질 수 있는 순간마다 콜린의 이야기가 끼어들어 분위기를 환기시킨다. 진지한 사랑 이야기들 사이에서 숨통을 틔워주는 역할.
미국 술집에서 여자들이 그의 억양에 열광하고, 결국 여러 명의 여자들과 함께 돌아오는 결말. 비현실적이지만, 그래서 더 웃긴다. 사랑이 때로는 이렇게 가볍고 즐거울 수도 있다는 걸 보여준다.
빌 나이의 특별 출연, 쓸쓸한 록스타의 우정
빌 나이가 연기한 늙은 록스타 빌리 맥의 이야기는 엉뚱하면서도 따뜻하다. 전성기가 지난 가수가 크리스마스 캐럴을 우스꽝스럽게 리메이크해서 1위를 노린다. 그는 TV 인터뷰마다 나와서 솔직하게 말한다. "돈 때문에 이렇게 저질스러운 짓을 합니다."
결국 크리스마스 1위를 차지한 빌리 맥. 그에게는 엘튼 존의 파티 초대장이 온다. 하지만 그는 파티 대신 오랜 매니저 조의 집으로 간다. 크리스마스 이브를 함께 보내기 위해. "아무리 생각해봐도 당신이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이야."
이 장면이 의미 있는 이유는 사랑이 꼭 로맨틱한 것만은 아니라는 걸 보여주기 때문이다. 우정도 사랑이다. 가족도, 동료도 사랑이다. 빌리 맥과 조의 관계는 그 어떤 연인 관계보다 깊고 진실하다.
크리스마스라는 시간, 마법 같은 계절
'러브 액츄얼리'가 크리스마스 영화로 사랑받는 이유는 단순히 크리스마스 시즌을 배경으로 하기 때문만이 아니다. 크리스마스가 가진 의미를 영화 전체에 녹여냈기 때문이다.
크리스마스는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하는 시간이다. 한 해를 돌아보고, 소중한 것들을 확인하는 시간. 그래서 많은 캐릭터들이 크리스마스에 용기를 낸다. 고백하고, 화해하고, 결정한다.
학교 크리스마스 공연 장면에서 여러 이야기가 한 공간에서 만나는 구조도 효과적이다. 부모들이 아이들의 공연을 보러 모이는 흔한 일상. 하지만 각자에게는 특별한 순간이다. 카렌은 남편의 배신을 참으며, 대니얼은 샘의 성장을 지켜보며, 샘은 첫사랑을 고백할 용기를 낸다.
공항 장면, 모든 이야기가 교차하는 곳
영화는 공항 장면으로 시작해서 공항 장면으로 끝난다. 히드로 공항 도착 로비. 사람들이 사랑하는 사람을 맞이하는 장소.
마지막 장면에서 우리는 여러 커플의 그 후를 본다. 제이미와 오렐리아가 함께 영국으로 돌아오고, 콜린이 미국 여자들과 함께 나타나고, 샘이 조안나를 배웅하러 온다. 모두가 교차하지만 서로를 모른다. 하지만 관객인 우리는 그들 모두의 이야기를 안다.
이 구조가 주는 메시지는 명확하다. 우리 모두는 각자의 사랑 이야기를 살아간다. 서로 모르는 사이지만, 같은 공간에서, 같은 감정을 느끼며 살아간다. 사랑은 정말로 우리 주변 모든 곳에 존재한다.
20년이 지나도 여전히 사랑받는 이유
2003년 개봉 이후 '러브 액츄얼리'는 매년 크리스마스 시즌이면 다시 찾는 영화가 됐다. 극장에서 재개봉하고, TV에서 방영하고, 스트리밍 플랫폼에서 상위권에 오른다.
이 영화가 시대를 초월하는 이유는 사랑의 보편성을 다루기 때문이다. 총리의 사랑이나 작가의 사랑이나 학생의 사랑이나 본질은 같다. 두근거림, 설렘, 불안, 기쁨, 아픔. 이런 감정들은 2003년이나 2024년이나 변하지 않는다.
물론 일부 장면은 지금 보면 논란의 여지가 있다. 특히 마크의 고백 장면은 요즘 기준으로는 부담스럽게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영화 전체가 전하는 메시지 - 사랑의 다양한 형태와 보편성 - 는 여전히 유효하다.
마치며
영화가 끝나고 나면 자연스럽게 주변 사람들을 떠올리게 된다. 가족, 친구, 연인. 일상에서 당연하게 여겼던 관계들이 새삼 소중하게 느껴진다.
'러브 액츄얼리'는 완벽한 영화가 아니다. 어떤 에피소드는 깊이가 부족하고, 어떤 결말은 성급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가 사랑받는 이유는 진심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리처드 커티스가 진짜로 믿는 메시지 - 사랑은 실제로 존재한다 - 가 영화 전체에서 빛난다.
올해 크리스마스에도 이 영화를 다시 볼 것 같다. 어쩌면 매년 크리스마스의 전통이 된 것 같다. 따뜻한 차 한 잔, 담요, 그리고 '러브 액츄얼리'.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한 크리스마스 이브가 될 것이다.
만약 아직 이 영화를 보지 않았다면, 올해 크리스마스에 꼭 한 번 보기를 권한다. 그리고 이미 본 사람이라면, 다시 한번 보기를. 볼 때마다 다른 이야기가 마음에 와닿을 것이다. 그게 바로 '러브 액츄얼리'의 마법이다.
영화 정보
- 제목: 러브 액츄얼리 (Love Actually)
- 개봉: 2003년
- 감독: 리처드 커티스
- 출연: 휴 그랜트, 콜린 퍼스, 엠마 톰슨, 앨런 릭먼, 리암 니슨, 키이라 나이틀리, 앤드류 링컨, 빌 나이 외 다수
- 장르: 로맨틱 코미디
- 러닝타임: 135분
- 평점: ★★★★☆ (4.5/5)
이런 분들께 추천합니다
- 크리스마스 시즌 분위기를 느끼고 싶은 분
- 여러 이야기가 교차하는 옴니버스 구조를 좋아하는 분
- 영국 배우들의 앙상블 연기를 즐기는 분
- 달콤하면서도 씁쓸한 현실적 로맨스를 원하는 분
- 사랑의 다양한 형태에 대해 생각해보고 싶은 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