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토요일 오후, 홍차와 함께 꺼낸 추억의 영화
토요일 오후, 딸아이는 친구들과 놀러 가고 아내는 친정에 다녀온다고 해서 오랜만에 혼자만의 시간이 생겼다. 날씨가 쌀쌀해진 11월, 따뜻한 홍차를 한 잔 끓여놓고 소파에 앉았다. 무엇을 볼까 고민하다가 문득 떠오른 영화가 있었다. '네 번의 결혼식과 한 번의 장례식'. 휴 그랜트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작품이자, 90년대 영국 로맨틱 코미디의 대표작이다.
이 영화를 처음 본 건 대학교 2학년 때였다. 당시 교양 영어 수업에서 교수님이 영국 문화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며 추천해주신 영화였는데, 그때는 영국식 유머가 낯설어서 절반도 이해하지 못했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지금 다시 보니 그때는 몰랐던 디테일들이 하나둘 보이기 시작한다. 마치 수학 문제를 처음 볼 때는 어려워 보이다가, 시간이 지나고 나서 다시 보면 의외로 간단하게 느껴지는 것처럼 말이다.
찰스와 그의 친구들, 30대 싱글들의 결혼식 순례기
영화는 찰스(휴 그랜트)와 그의 친구들이 끊임없이 결혼식에 참석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30대 중반의 찰스는 매번 결혼식에 지각하고, 축사는 더듬거리며, 연애는 시작도 제대로 못하는 전형적인 '결혼 못하는 남자'다. 그의 주변 친구들도 비슷한 처지다. 스칼렛(샬롯 콜맨)은 찰스를 짝사랑하지만 표현하지 못하고, 톰(제임스 플릿)은 부유하지만 사랑에는 서툴고, 피오나(크리스틴 스콧 토마스)는 독신주의자처럼 보이지만 실은 외로움을 숨기고 있다.
첫 번째 결혼식에서 찰스는 캐리(앤디 맥도웰)를 만난다. 미국에서 온 그녀는 자유분방하고 솔직해서 영국인들 사이에서 유독 돋보인다. 찰스는 첫눈에 반하지만, 캐리는 하루 밤을 보내고 미국으로 돌아가 버린다. 그리고 몇 달 후 두 번째 결혼식에서 재회하지만, 이번엔 캐리가 약혼자를 데리고 나타난다.
이 설정이 정말 영리하다고 생각한다. 결혼식이라는 공간은 싱글들에게는 일종의 압박이 되는 장소다. 모두가 "넌 언제?"라고 묻고, 부케를 받으려는 미혼 여성들의 경쟁이 펼쳐지고, 커플들의 행복한 모습을 지켜봐야 한다. 나도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까지 친구들 결혼식에 참석할 때마다 비슷한 압박을 느꼈던 기억이 난다. 특히 부모님이 "너도 이제 결혼할 나이 아니니?"라고 물으실 때면 찰스처럼 어색하게 웃으며 넘기곤 했다.
영국식 유머와 미국식 로맨스의 절묘한 조화
이 영화의 가장 큰 매력은 영국 특유의 건조하고 자조적인 유머다. 찰스가 결혼식에서 하는 축사는 매번 재앙 수준이고, 친구들과 나누는 대화는 겉으로는 담담하지만 속으로는 불안으로 가득 차 있다. 특히 게이 커플인 매튜(사이먼 칼로우)와 가레스(존 해나)의 관계를 그리는 방식이 인상적이다. 1994년이라는 시대를 고려하면 상당히 진보적이었는데, 그들의 사랑을 특별하게 다루지 않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태도가 오히려 더 감동적이다.
영국 유학을 준비하는 학생들에게 가끔 이 영화를 추천한다. "영국 사람들의 대화 방식을 이해하려면 이 영화를 보세요. 그들은 좋아한다고 직접 말하는 대신 '싫지 않다'고 표현하고, 최고라고 말하는 대신 '나쁘지 않다'고 표현해요"라고 설명하면서 말이다. 실제로 영화 속 찰스가 캐리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방식도 그렇다. "I love you"라고 직접 말하기보다는 빙빙 돌려서 표현하다가 결국 폭발하는 식이다.
반면 앤디 맥도웰이 연기한 캐리는 전형적인 미국인이다. 생각한 것을 바로 말하고, 원하는 것을 숨기지 않는다. 첫 만남에서 찰스와 하룻밤을 보내는 것도, 나중에 다른 남자와 약혼한 것도, 모두 그녀의 솔직한 선택이다. 이런 문화적 차이가 만들어내는 긴장감이 영화에 활력을 불어넣는다.
네 번째 결혼식, 그리고 예상치 못한 장례식
영화는 순조롭게 진행되다가 갑작스럽게 비극으로 전환된다. 네 번째 결혼식인 찰스의 결혼식 직전, 가레스가 심장마비로 급작스럽게 세상을 떠난다. 화려한 결혼식 준비 중에 찾아온 죽음은 관객들에게 큰 충격을 준다. 특히 매튜가 W.H. 오든의 시 "Funeral Blues"를 낭독하는 장면은 영화 역사상 가장 아름답고 슬픈 장례식 장면 중 하나로 꼽힌다.
"Stop all the clocks, cut off the telephone, Prevent the dog from barking with a juicy bone..."
매튜의 떨리는 목소리로 읽어 내려가는 이 시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상실감을 너무나 완벽하게 표현한다. 나도 몇 년 전 대학 동기의 장례식에 참석했을 때 이 장면이 떠올랐다. 유치원에 다니던 쌍둥이 딸을 놔두고 급성암으로 갑작스럽게 떠난 친구를 보며, 삶이 얼마나 예측 불가능한지 그리고 가족에 대한 가장의 책임감까지 실감했다. 그때 이후로 가족과 보내는 평범한 일상이 얼마나 소중한지 더 자주 생각하게 되었다.
영화는 이 장례식을 통해 메시지를 전한다.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망설이지 말라고. 내일이 보장된 것이 아니니 오늘 고백하라고. 찰스도 가레스의 죽음을 통해 깨닫는다. 자신이 정말 사랑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그리고 더 이상 기다릴 시간이 없다는 것을.
빗속의 고백, 그리고 '결혼하지 않겠다'는 프로포즈
영화의 클라이맥스는 찰스의 결혼식이다. 하지만 그는 제단 앞에서 "I don't"라고 말한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의 결혼을 거부한 것이다. 이 장면에서 휴 그랜트의 연기가 빛난다. 더듬거리면서도 확고한 의지를 보여주는 그의 모습은 찰스라는 캐릭터의 정수를 보여준다.
결혼식장을 나온 찰스는 비를 맞으며 캐리를 만난다. 그리고 그 유명한 대사가 나온다. "결혼하지 않을래요?" 전통적인 프로포즈와는 정반대의 제안이지만, 오히려 더 진실하게 들린다. 결혼이라는 형식보다 함께 있음 자체가 중요하다는 메시지다.
이 장면을 볼 때마다 아내와의 결혼을 떠올린다. 우리도 결혼식은 작게 했다. 서울이 아닌 시골 고향에서 화려한 예식장이 아닌 교원회관에 있는 부설 예식장에서, 수백 명의 하객 대신 가족과 교회 친구들만 초대해서 조촐하게 치렀다. 중요한 건 결혼식이 아니라 결혼 생활이라는 걸 알았으니까.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잘한 선택이었다. 그 돈으로 신혼여행을 더 길게 다녀왔고, 그때의 추억이 지금도 우리 부부를 지탱하는 힘이 되고 있다.
조연 캐릭터들이 빛나는 영화
이 영화의 또 다른 매력은 풍성한 조연 캐릭터들이다. 특히 찰스의 귀 먹은 동생 데이비드(데이비드 바우어)는 수화로만 대화하지만 누구보다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형에게 조언을 해준다. 그가 수화로 "너는 바보야"라고 말하는 장면들은 웃기면서도 따뜻하다.
스칼렛의 이야기도 인상적이다. 찰스를 짝사랑하다가 결국 다른 사람과 결혼하는 그녀의 선택은 현실적이면서도 슬프다. "완벽한 사람을 기다리다가 인생을 놓치는 것보다, 괜찮은 사람과 행복을 만들어가는 게 낫다"는 그녀의 대사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학원에서 진로 상담을 할 때 가끔 이런 이야기를 한다. "꿈의 대학만 고집하다가 기회를 놓치는 것보다, 갈 수 있는 최선의 대학에서 최고가 되는 것이 더 현명할 수 있어요." 물론 꿈을 포기하라는 건 아니지만, 때로는 현실적인 선택도 필요하다는 걸 알려주려고 노력한다.
90년대 영국 문화의 타임캡슐
이 영화는 90년대 영국 중산층의 모습을 그대로 담아낸 타임캡슐 같다. 전통적인 영국식 결혼식, 교회에서의 예배, 시골 저택에서의 피로연, 그리고 런던의 플랫에서 살아가는 젊은이들의 모습까지. 특히 휴대폰이 없던 시절, 삐삐로 연락하고 공중전화로 통화하는 모습이 지금 보면 낯설면서도 정겹다.
딸아이에게 이 영화를 보여준다면 아마 "아빠, 왜 문자를 안 보내고 직접 찾아가요?"라고 물을 것 같다. 그때 나는 이렇게 대답하고 싶다. "그때는 그게 로맨틱했단다. 상대방을 만나기 위해 직접 찾아가고, 우연한 만남을 기대하고, 편지를 쓰고... 불편했지만 그래서 더 특별했어."
휴 그랜트가 만든 새로운 로맨틱 히어로
이 영화로 휴 그랜트는 완전히 새로운 타입의 로맨틱 코미디 남자 주인공을 만들어냈다. 리처드 기어처럼 완벽한 신사도 아니고, 톰 행크스처럼 따뜻한 이웃집 남자도 아니다. 그는 더듬거리고, 실수하고, 우유부단하고, 때로는 한심하기까지 하다. 하지만 그래서 더 진짜 같고 공감이 간다.
학원에서 남학생들을 보면 찰스 같은 타입이 꽤 있다. 마음은 있는데 표현을 못 하고, 좋아하는데 다가가지 못하고, 고백하려다가 타이밍을 놓치는 아이들. 그런 학생들에게 나는 이렇게 조언한다. "완벽할 필요는 없어. 진심이 중요한 거야. 더듬거리더라도 네 마음을 전달하는 게 중요해."
리처드 커티스의 첫 번째 마스터피스
이 영화의 각본을 쓴 리처드 커티스는 이후 '노팅힐', '러브 액츄얼리', '어바웃 타임' 등을 통해 로맨틱 코미디의 대가가 되었다. 하지만 그의 첫 번째 대표작인 이 영화가 가장 순수하고 진솔하다는 생각이 든다. 아직은 할리우드에 물들지 않은, 영국 정서가 고스란히 담긴 작품이기 때문이다.
특히 대사의 리듬감이 탁월하다. 영국식 영어의 운율을 살린 대사들은 마치 셰익스피어의 희극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것 같다. "네 번의 결혼식과 한 번의 장례식"이라는 제목 자체도 시적이다. 삶의 기쁨과 슬픔이 교차하는 인생의 아이러니를 한 문장으로 표현한 것이니까.
마무리: 형식보다 중요한 것은 진심
토요일 오후에 시작한 영화가 끝날 즈음, 밖은 어느새 어둑해졌다. 홍차는 식었지만 마음은 따뜻해졌다. 이 영화가 전하는 메시지는 단순하지만 강력하다. 결혼이라는 형식보다 중요한 것은 함께하고 싶은 마음이라는 것. 완벽한 타이밍을 기다리기보다는 지금 이 순간 고백하는 용기가 필요하다는 것.
문득 아내에게 문자를 보냈다. "오늘 저녁은 내가 준비할게. 사랑해." 곧바로 답장이 왔다. "갑자기 왜? ㅋㅋ 나도 사랑해." 25년 전 영화가 오늘의 나에게 준 작은 선물이다.
딸아이가 집에 돌아왔다. "아빠, 뭐 봤어요?" "영국 영화 하나 봤어." "재밌었어요?" 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응, 네가 좀 더 크면 같이 보자. 사랑에 대해 이야기할 거리가 많은 영화야."
언젠가 딸이 첫사랑에 빠지고, 가슴 아픈 이별을 겪고, 진짜 사랑을 찾아갈 때, 이 영화를 함께 보고 싶다. 그리고 말해주고 싶다. 사랑은 완벽하지 않아도 된다고. 더듬거리고 실수해도 괜찮다고. 중요한 건 진심이라고.
영화 정보
- 제목: Four Weddings and a Funeral (네 번의 결혼식과 한 번의 장례식)
- 개봉: 1994년
- 감독: 마이크 뉴웰
- 각본: 리처드 커티스
- 출연: 휴 그랜트, 앤디 맥도웰, 크리스틴 스콧 토마스, 사이먼 칼로우
- 장르: 로맨틱 코미디
- 러닝타임: 117분
평점: ★★★★★ (5/5)
30년이 지난 지금 봐도 전혀 촌스럽지 않은, 오히려 더 특별해 보이는 작품이다. 영국식 유머와 보편적 감동이 완벽하게 균형을 이룬 로맨틱 코미디의 교과서 같은 영화다.
추천하고 싶은 분들:
- 영국 문화와 유머를 경험하고 싶은 분들
- 휴 그랜트의 전성기 연기를 보고 싶은 분들
- 틀에 박히지 않은 독특한 로맨틱 코미디를 찾는 분들
- 90년대 감성을 그리워하는 분들
- 결혼을 앞두고 있거나 결혼에 대해 고민하는 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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